[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 오현(五賢)의 학덕과 공적 기리는 임천서원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 오현(五賢)의 학덕과 공적 기리는 임천서원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3.2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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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숙종 28년) 창건…1928년 금산 가방에 복원
강응태(姜應台) 충효가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 내려져
이준민(李俊民) 남명선생의 외조카로 병조판서까지 역임

<19>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

지금까지는 진주성과 촉석루 중심의 고전바탕으로 진주성과 촉석루에 대한 심층적 고찰을 기록해왔다. 이제부터는 진주지역의 선비고을로서의 상징인 수많은 역사적 진주 서원들에 대한 기술을 전개하고자 한다.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소재한 임천서원.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소재한 임천서원.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임천서원(臨川書院)은 1702년(숙종 28년)에 조선중기 진주출신 대학자인 진주 오현(五賢)선생, 즉 이준민(李俊民), 강응태(姜應台), 성여신(成汝信), 하증(河憕),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덕과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역 유림들이 창건했다.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1869년(고종 6년)에 이 서원도 훼철되었다가 1928년 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314-2번지 산 아래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부터는 본 임천서원에 봉안되신 진주출신의 위대한 학자들이신 소위 진주 오현선생님들의 행장과 학문적 업적을 기술하기로 한다.

우선 오현중에서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에 대한 내용은 본지 12호에 이미 자세히 기록한바 있기 때문에 금일 본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나머지 네 분인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선생들에 대해서 그들의 행장과 학문적 업적을 기술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강응태(姜應台)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대림(大臨), 호는 성재(誠齋)로 아버지는 현감 관(琯)이며, 어머니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순후장자(醇厚長者)라는 칭송을 받았다. 나이 겨우 10여 세 때 아버지 현감 관(琯)이 중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소생케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퇴계(退溪) 선생의 시에 이르기를, “정공의 유택이 있고 강씨의 정려가 우뚝하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공의 유택은 고려충신 ‘우곡 정온’의 유택을 말한다. 조부 안중(安重)은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부친 관(琯) 역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벼슬을 하였다. 1492년(성종 5년) 진주 월아산 아래 수성리(修誠里)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에 ‘성재공 유허비’가 있다.

임천서원 편액.
임천서원 편액.

성재는 41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성균관 사헌부 시강원 등에서 벼슬을 하다가, 을사사화 이후로 정국이 불안함을 보고 외직으로 나가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을 하던 중 병으로 잠시 진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홍문관 부수찬으로 불렀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고, 1551년에 비로소 밀양부사에 부임해 그 이듬해 관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성재의 효행 기록은 ‘진양지’에 실려 전하는데, “강응태의 자는 대림이니 가정 임진년에 별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청현을 역임하고 밀양부사에서 마쳤다. 나이 겨우 10여세 되던 때에, 아버지 현감 강관이 중병에 걸렸더니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효험을 얻었고, 또 중종과 인종 두 분의 상을 입었으므로 충효가 두 가지 다 극진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세웠다”라고 되어있다. 성재의 충효가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정려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금산면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손상을 입었으며, 임진왜란이 지난 뒤 비를 다시 세우면서, 이때 금산면에서 사봉면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정려비문은 백암 김대명이 지었는데, 김대명은 남명의 제자로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으며. 성재의 사위이기도 하다. 성재의 ‘충효비각’은 지금 사봉면 백야 용소뜰 가운데 있다. 이 비각은 임진왜란때 훼손된 것을 1841년(헌종 7년)에 중수를 하였으나, 1852년 들에 불이 나서 소실되고, 1864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성재 강응태의 뛰어난 학문과 행적이 후세에 길이 전해져 진주의 유림들은 임천서원에 위패를 모셔 제향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이준민(李俊民)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남명선생의 외조카이다. 자는 자수(子修)이고, 호는 신암(新菴)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그는 1524년(중종 19년)에 아버지 공량(公亮)과 어머니 창녕 조씨 언형(彦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암은 어려서부터 외숙인 남명문하에 출입하여, 26세(154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33세(1556년)에 황해도사로 벼슬을 옮겨 문신들이 보는 과거인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성균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벼슬을 지냈는데 32세(1555년)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이 때 홍문관 부재학 이량(1519~1563년)이 권세를 믿고 조정을 어지럽히자 정언의 직분을 다하고자 이를 탄핵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신암은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문과 급제 후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후손들은 고향인 진주 금산을 떠나 서울에 살게 되었고 신암은 부모를 뵈러 진주에 자주 내려왔다. 35세(1558년)에 진주로 오다가 우연히 두류산 유람을 떠나는 외숙 남명선생을 만났는데, 이때의 상황을 남명선생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저녁 무렵 진주에서 묵었다. 일찍이 홍지(진주목사 김홍)와 약속하여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말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종사관 이준민을 만났다. 호남 땅에서 아버지를 뵈러 오는 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숙이었다.

65세(1588년)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어머니는 90세를 넘긴 나이였다. 어머니 생전에 이준민 역시 백발노인이었지만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신암은 서울에서 정철(鄭澈)과 이웃하여 살았는데 정철이 매일 새벽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아 말하기를, “이판서가 어머니 방에 문안드리러 가는 구나”라고 했다한다. 68세(1591년)에 신암은 어머니 상을 당하자 더운 여름인 데도 빈소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으며, 이로 인해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양주 고령산에 장사지냈으며, 나라에서는 효익(孝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음호에 계속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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