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은열공 鄭臣烈과 문충군 鄭天益 모신 淸溪書院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은열공 鄭臣烈과 문충군 鄭天益 모신 淸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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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2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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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열공 정신열 고려조 거란 침략 물리치는데 공로
문충군 정천익 목면 시배·씨아 물레 베틀 등 창제

당초 남강변에 건립…1961년 복원사업으로 현 위치
중재 김황 선생이 撰한 서원 내 경덕사 柱聯이 유명

<24>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6>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한 진양(진주)정씨 은열공파 대종회 재실이 있는 청계서원.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한 진양(진주)정씨 은열공파 대종회 재실이 있는 청계서원.

본 호에서는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진양(진주)정씨 은열공파 대종회 재실이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서원은 고려시대 나라를 지켜 낸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殷列公 官亭 鄭臣㤠 先生)과 목면(木棉)씨를 길러내어 모든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못을 입게 한 퇴헌 정천익 선생(退軒 鄭天益 先生)을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곳이고 또 한편으로는 후진들을 가르치려고 강론(講論)하는 곳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청계서원을 살펴본다면, 현재 진주시 남강로 626번지 남성동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청계서원은 고려 병부상서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鄭臣㤠) 선생과 고려 공민왕13년(갑진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성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고려사, 태조실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의 전객령판부사(典客令判府事)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군 퇴헌 정천익(鄭天益)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했던 사람들이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라는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본 서원은 사당, 강당, 고직사(庫直舍) 영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지닌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6칸의 청계서원 강당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이 마당의 좌·우측에는 비석을 2개 배치했다. 강당의 좌측은 경덕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집이다. 강당의 우측은 정면 3칸의 고직사가 있고, 그 뒤로 다시 정면 3칸의 숭은사라는 사당을 배치했다.

본 서원 내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서원 내의 경덕사(景德祠)에 걸려있는 주련(柱聯)이다. 본 주련의 내용도 훌륭하지만, 그 주련을 찬(撰)한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도 훌륭한 유학자로써 본 주련의 원문과 김황 선생의 행적을 함께 기술해보기로 한다.

우선 김황선생의 주련의 원문을 보면

淸溪書院 柱聯

鳳山盤屹仰止彌高

우뚝 솟은 비봉산 우러러 볼수록 높고,

藍水澄淸源來有自

맑은 남강 물 맑은 근원 있기에 쉼없이 흘러내리네,

天運物生一條理直

만물을 생성하는 하늘의 이치 올 곧아,

地靈人傑萬古名流

영험있는 이 땅에 만고 인물 이어가네,

采蘋羞藻明信焉先

선대 제사 고기 나물로 잘 모시니 그 정성 정말 믿어우니,

說禮敦詩淳風可挽

시와 예를 가르쳐 좋은 풍속 이어가네,

循厥詒謀維其篤矣

후손들 위한 좋은 업적 남김이 그렇게도 돈독하고,

昭玆來許敢不敬歟

이어 온 일 소상하니 어찌 감히 존경치 않으리오.

이어 상기 주련을 찬(撰)하신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의 행적을 살피기로 한다.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년-1978년)은 본관이 의성(義城)이며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이다. 일명 우림(佑林)으로도 불리며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던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이다.

그는 의령 어촌리에서 출생하여,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아버지를 따라 경남 산청 황매산 자락 만암(晩巖)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여 학업에 전념했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 : 심즉이설(心卽理說 바탕의 도학)의 주리학을 대표하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명을 떨쳐 그 학통을 계승했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했다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났고,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후 일본경찰에 발각,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뤘다.

1926년 동문들과 ‘면우집’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으기도 했다. 1928년 산청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그 후 50년간 1000여 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고, 8.15광복 후에도 대학생과 교수들이 몰려와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 유림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결국 중재 김황 선생은 한주학파의 주리학 학통을 정립한 대유학자이며, 또한 1919년 3월에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 교육자이자 진정한 애국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흔적이 본 서원의 주련에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본 란의 내용은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교실’에서도 강의되고 있는 교과내용입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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