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랑] 등불같은 93세 엄마
[오! 사랑] 등불같은 93세 엄마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5.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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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른
고향 까꼬실은 기억하는 엄마
업고서라도 고향나들이 할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정도순/교사

책을 보다가도 드라마에서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목이 메고 울컥합니다. 우리 엄마는 이팔청춘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21살 여드름쟁이 아버지를 만나 아홉을 낳아 일곱을 키웠습니다. 힘들게 사느라고 자식 키우느라고 엄마는 기와 진을 다 빼고 고목이 되신 거 같습니다. 지팡이 없이 아직도 나지막한 뒷동산은 오르실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 숨이 차서 마실도 집 근처를 몇 바퀴 도는 게 고작입니다.

젊어서는 지리산과 그 주변의 험난한 산도 거뜬하게 올라 산나물을 뜯었답니다. 그 나물은 햇살좋은 날 꼬들꼬들 말려서 아들과 딸, 사돈댁까지 챙겨주셨습니다. 김치를 담그면 봉지 봉지 담아서 나눠줬습니다. 자식들은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가끔 귀찮다는 내색도 했습니다.

세월이 부지런하고 날랬던 그 엄마를 아기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날은 생전 부르지 않던 사위 이름도 부르고 딸을 질녀라고 하기도 합니다. 몇 해 전부터 엄마에게 착한 치매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도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해만 뜨면 길가에 서 계셨더랬습니다. 사람소리만 나도 고개 돌려 자식들이 오나 기다리는 모습만 보면 부담스러워 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애먼소리도 했습니다. 경로당 좀 가라고, 엄마는 성격이 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냐고.

이제는 기억도 없고 자식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경로당 가는 것을 극구 싫어하던 엄마가 어르신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엄마는 유치원 가기 싫은지 어지럽다며 쓰러지기도 하고 화장실문을 잠그고 등원거부 시위를 해서 여러 사람을 긴장시키기도 합니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 물으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곳, 시집와서 농사짓고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른 곳 까꼬실이라고 합니다. 까꼬실은 진양호 수몰지구 귀곡의 다른 이름입니다. 몇 해 전부터 주말이면 엄마를 모시고 언니 동생과 까꼬실로 나들이를 시작했습니다.

한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엄두를 못 내기 때문에 겨울에는 봄이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립니다. 진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제주도 못지않은 별천지가 펼쳐집니다. 쭉쭉 뻗은 대나무 숲, 오래전 엄마가 물을 길어먹던 약수터, 돗나물, 취나물, 고사리, 두릅, 앵두, 죽순…. 천지가 먹을 것입니다.

엄마는 손톱에 나물물이 들어 시껌해져도 좋은가 봅니다. 올해도 여전히 갑니다. 하지만 길옆에서만 나물을 캐고 산에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엄마의 치매가 서서히 진행되어 직진하면 어디로 내려와야 할지 모르고 숨이 차서 오르기가 힘들어서입니다. 얼마 전엔 엄마의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 딸들이 번갈아 가면서 업었습니다. 아기처럼 쏙 안기는 작은 몸이 어찌 그리 가볍던지 핑 눈물이 돌았습니다.

남들은 부러워합니다. 엄마가 계셔서 얼마나 좋냐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표정이 해맑은 우리 엄마. 그런 엄마가 계셔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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