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홍유후 설총 문창후 등 신라 大名儒들을 모셔
1922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진주 금곡 죽곡리 소재
<25>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7>
남악서원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817-1번지에 위치해 있다.
최초 창건 연대는 통일 신라시대인 618년이며, 그 후 1922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고, 경주에 서악서원(西岳書院)이 있음으로, 이곳은 남악서원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남악서원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의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금산 아래서 진을 치고 휴식하던 중,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삼국통일 위업의 가르침을 받아 높은 공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남악서원은 김유신, 최치원의 영정과 홍유후, 설총, 문창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써, 특히 김유신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로서 신라 귀족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대장군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구형왕은 산청군 금서면의 왕산자락에 묻혀있다.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양도해 주는 대신에, 가야의 귀족과 백성들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받고, 자신은 지리산자락 왕산에 와서 여생을 마쳤던 것이다.
김유신이 신라의 성골, 진골 등 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인 구형왕이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 것이다. 구형왕은 숨을 거두기 전에 “나라를 잃은 왕이니 나의 무덤을 돌로 덮어 달라”라고 유언함으로써 구형왕릉은 지금처럼 돌무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설총은 생몰연대가 불분명한 사람이나 태종무열왕 때인 654년과 66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신라 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삼문장(新羅三文章)으로 부릴 정도로 경사(經史)와 문학에 널리 통달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화왕계’를 지어 들려준 기사가 나오는데, 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을 전한 것이라 한다. 설총은 낮은 신분이었으나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남악서원의 경내에는 사당, 서원, 2동의 재사(齋舍), 솟을대문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서원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대청이 없이 툇마루가 확장되어 대청의 기능을 한다. 서원 좌우에 마주보고 있는 재사(齋舍)는 각각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다.
서원 바로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방문객들을 먼저 맞이하는데 사계절 언제 찾아가도 나름 대로 운치와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기도 하다. 본 서원은 서원의 건축 구조상 툇마루를 확장하여 대청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며, 지형지세를 그대로 활용하여 사당과 서원이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게 했다.
특히 현재 이곳은 삼베체험 마을로 육성되어 삼베 전시관도 관람할 수도 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