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칼럼] 어느 정치인의 막말
[정용우칼럼] 어느 정치인의 막말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5.0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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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지자연이 언제 말을 하더냐? 그러나 사시가 움직여 만물이 생겨나느니라”고. 과연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싱그러운 기운이 몸에 느껴져 밖으로 나가 마당 주변 화단을 둘러보았다. 나날이 다르게 변해가는 모습들이 신비롭다. 텃밭도 둘러보았다. 노심초사 고대하고 있던 상추 잎이 드디어 땅 밖으로 솟아났다. 가지런히 줄을 지어 올라오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자연은 이렇게 만물을 낳고 키우고 모든 일을 처리해 가면서도 말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자연과 달리 말이 많다. 온종일 시끄럽다. 막말이 난무한다. 정치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난 4월, 우리는 많이 아팠다. 5년 전, 안전보다 이윤을, 생명보다 효율을 중시해 생때같은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 때문이다. 올해도 서울과 안산, 진도 등에서 추모와 애도의 노란리본이 물결치고,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5년 전의 다짐과 약속을 되새겼다.

그 아픈 4월에 한 정치인이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을 욕보이고 조롱하는 막말을 쏟아냈다. 그는 지난달 15일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세월호 유가족을 욕보이고 조롱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체 팔이’ ‘죽음의 굿판’ 같은 짐승의 언어로 자식 잃은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더니, 아직도 이런 몰상식한 폭언이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모욕과 조롱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이다. 인간성을 부인하는 전쟁과 학살의 언어다. 참담할 따름이다.

왜 이런 일이 공연하게 또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열심히 공부한 머리는 있을지 몰라도 따뜻한 가슴은 없는 사람들. 그래서 남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과 상대를 배려하는 교감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세계, 자기 파당의 세력 규합을 위해 이런 망언조차 정치공세의 하나로 치부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탓이다. 자기중심적이며 극도로 편협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의 병든 시각을 아무에게나 투영해서 타인의 삶의 의지를 꺾는다. 싸움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싸우기 위해 정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과 다툼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정치의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이지, 거꾸로 정치가 갈등을 더 심화시키고 싸움을 인위적으로 조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反)정치적, 반사회적인 행위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실종, 사회적 유대의 상실, 집단이기주의의 부박한 행태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정치는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다. 공동체를 함께 살아갈 만한 풍요로운 곳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으뜸은 생산도 성장도 기술도 아닌 좋은 말의 효과에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면 정치의 긍정적 기능은 기대할 수 없다. 하여 정치인은 말을 하되, 그 말이 무의미한 갈등의 불씨가 되게 해서는 안 되고, 공동체를 살리는 말이 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설령 당파적인 입장을 말하더라도 최대한 보편적이고 공정하여야 한다. 그저 자신들의 계파와 파당적 입장만 고집스럽게 내세워서는 안 되며 상대를 무분별하게 비난·비판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과 철학, 미래비전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게 자당 득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공이익 실현을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확대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일반 대중의 경험세계 속에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공명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 갖고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입 밖에 낸 말은 쏜 화살이나 흘러간 시간과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분이 나쁘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화가 난다고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가 후회한 게 한 두 번이었던가. 우리 세상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는 없다. 옳은 말이라도 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참을 줄 아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다시 공자님 이야기.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했다(말했다). 이를 듣고서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두 번이면 된다”(論語 ‘公冶長’)고 하셨다. 두 번 생각한다는 것은, 내 처지에서 한 번 생각한 후, 뒤집어 상대방 처지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뜻이 아닐까. 우리 모두 명심할 일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말이 지나간 자리에 후회와 한숨만 남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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