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교육의 발원지(發源地) 진주향교(晉州鄕校)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진주교육의 발원지(發源地) 진주향교(晉州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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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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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때부터 국가 차원의 교육 중심지역 역할 수행
987년(고려 성종 6년) 의곡사 계곡에 鄕學堂 창건 추정
1398년(조선 태조 7년) 문묘가 창건되어 향교의 틀 갖춰
1962년 명륜당 등 현 위치로 이건, 1986년 四敎堂 중건
공자 등 중국성현 7위 · 최치원 등 우리 성현 18위 봉안

<27>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9>

진주향교 전경.
진주향교 전경.

진주시 향교로 99-3(옥봉동)에 위치해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써, 진주교육의 상징인 진주향교의 문화재적 역사성과 가치를 고찰하기 전에, 전대 진주교육의 전통과 특성을 기술해 보기로 한다.

고대로부터 자연적인 생존교육을 실행해오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체계적인 교육기관에 의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신라 소성왕 원년(799)에 청주(菁州 지금의 진주) 노거현(老居縣)을 국학학생의 녹읍(祿邑)으로 정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향교가 있어 은렬공 강민첨(姜民瞻) 장군이 수학한 기록으로 보아 학문을 숭상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림파의 모임인 금란계가 조직되었고 영남학파의 중심지로 해동의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학문과 사상에 관한 지식수준이 매우 높은 곳)으로 명성을 날렸다.

진주향교의 정문인 풍화루.
진주향교의 정문인 풍화루.

1895년 당시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 경남에서 처음으로 ‘진주소학교’라는 근대식 학교가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수많은 공·사립학교가 생겼으며 특히, 일신재단의 설립은 진주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과 노력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일신재단은 일제의 갖가지 방해 속에서도 순수한 민간자본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는 오직 민족중흥을 교육에서 찾으려는 진주인의 애국심 발로의 표상으로, 그 근원과 바탕은 그 옛날 진주향교의 설립목적과 교육지향의 목표가 훌륭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립목적과 교육이념을 실천했던 진주향교는 987년(고려 성종 6년)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011년(고려 현종2년)에 중수(重修) 및 서재가 중건되었고,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西齋). 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1398년(태조 7년) 문묘가 창건되어 향교의 틀이 갖추어졌다.

1558년(명종 13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3년(선조 36년) 문묘를 중건하였고 1607년에 명륜당. 동재. 서재를 중건하는 등 수차례 중수하다가, 1962년 명륜당, 동재, 서재를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86년에는 사교당(四敎堂)이 중건되었다.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인 대성전.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인 대성전.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내삼문,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간좌곤향(艮坐坤向, 집터나 묏자리가 간방(艮方)을 등지고 곤방(坤方)을 향한 좌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간좌곤향이란 집이 서남향으로 앉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성전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전퇴(前退)를 두고 개방했는데 동무·서무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이 쌍여닫이 띠살문이고,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다.

명륜당은 정면 4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이며, 동재, 서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이다. 풍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벽면 없이 전부 개방되었다.

교육 영역에 명륜당 외에 사교당이 있어 명륜당이 두 개인 것처럼 느껴지며, 대성전의 내삼문(內三門)이 너무 들어와 동·서(東西廡)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중수 과정에 많은 변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1972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향교 입구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下馬)’라는 7자가 새겨진 비(碑)가 서 있다. 여기에 출입하는 자는 누구라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함을 알린 내용의 비다. 진주성 내에도 하마비가 있는데, 수령 이하는 말에서 내리라고 되어 있으나, 향교의 하마비는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내리라는 뜻으로 그만큼 교육을 중요시 여겼던 것 같다. 하마비는 경의의 표시로 1413년(태종 13년)에 종묘와 궐문 앞에 세운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이 비는 ‘영남진주교궁이건사적비(嶺南晉州校宮移建事蹟碑)’로 ‘임진왜란 때 진주향교가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년)에 비봉곡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1644년(인조 22년)에 자금의 자리에 중건하였으며, 1811년(순조 11년)에 중수했다’는 진주향교의 이건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1812년에 세워졌다. 진주향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60㎝, 폭 26.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비두)을 얹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의 일부가 풍화로 이해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이 사적비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조들의 항전(抗戰(항전)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잘 전해주고 있다.

진주향교에 봉안된 선대 성현 명유들을 나열 기술해 보면, 총 스물다섯분으로 중국 성현, 공자를 비롯한 일곱분과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우리 성현 명유로써 최치원을 바롯한 총 열여덟 분이 진주향교에 다음과 같이 봉안되어 있다.

1. 대성지성문선왕 공자(大成至聖宣王 孔子)

2. 연국복성공 안자(兗國復聖公 顔子)

3. 성국종성공 증자(郕國宗聖公 曾子)

4. 기국술성공 자사(沂國述聖公 子思)

5. 추국아성공 맹자(鄒國亞聖公 孟子)

6.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7.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8.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9. 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10.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11.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2.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3.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4.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6.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17.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8.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9.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20.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21. 문정공 김린후(文正公 金隣厚)

22.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23. 문열공 조헌(文烈公 趙憲)

24.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25.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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