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목화씨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선생 모신 도천서원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목화씨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선생 모신 도천서원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6.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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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공적·학문·덕행 추모하기 위해 1461년에 건립
1554년 명종으로부터 ‘도천(道川)’이란 편액 부여받아

앞- 교육영역, 뒤-제례공간 일반적인 서원 배치양식
중심축에 신안사재(新安思齋) 위치…제사의 기능 중시

<31>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3>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위치한 도천서원(道川書院).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위치한 도천서원(道川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로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위치한 도천서원(道川書院)은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 선생의 공적을 후세에 알리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461년(세조 7년)에 건립한 서원으로 1554년(명종 9년)에 왕으로부터 ‘도천(道川)’이라는 편액을 부여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그 뒤에 중수하였고, 1787년(정조 11년)에 다시 같은 이름의 편액을 다시 받았다.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뒤, 1891년(고종 28년)부터 지역민들에 의해 노산정사(盧山精舍)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75년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면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도천서원은 사당과 강당, 바깥 출입문을 일직 선상으로 배치하여, 앞에는 교육영역을 두고, 뒤에는 제례(祭禮)를 두는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양식을 따르고 있다. 앞쪽의 중앙 강당은 유생의 교육, 회합 및 토론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동·서재(東·西齋)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도천서원 신안사재(新安思齋).
도천서원 신안사재(新安思齋).

중심축에서 직각을 이루는 왼편에 신안사재(新安思齋)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이 서원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문익점 선생의 제사 때 제관(祭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1551년(명종 6년)에 창건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04년(순조 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신안사재(新安思齋)의 존재는 이곳이 교육보다는 제사의 기능을 중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천서원에 모셔진 문익점 선생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으로, 시호(諡號)는 충선(忠宣), 출생지는 강성현(江城縣(강성현 : 지금의 경남 산청)이다. 그의 부친 문숙선(文淑宣)은 과거에 급제해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문익점 선생은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 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2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6품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그러다가 1360년에 계품사(啟稟使)로 원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綿)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붓 뚜껑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推仰)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그 씨앗 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태종 1년 윤3월 1일자에도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숫자에 차이는 있지만, 붓 뚜껑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여튼 문익점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목면의 재배와 생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麻)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수확한 목화송이에서 씨를 제거하기 위한 기구)와 물레(솜에서 실을 자아내는 틀)를 사용하는 목면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목하 재배와 목면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세종대왕은 문익점을 ‘부민후(富民侯)’,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사람’으로 추증(追贈)토록 했던 것은 그가 백성의 농가경제를 풍요롭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문익점 선생은 상기와 같은 학덕은 물론 민생향상(民生向上)과 국부증진(國富增進)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고려 및 조선조에 하나의 새로운 산업 체제를 탄생시킨 인물로 공인되었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문익점 선생을 추앙하고 추모했기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도천서원을 건립하여 오늘날까지도 추모의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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