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전국 최대 인물지향 晋州의 상징 飛鳳山과 鳳卵臺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전국 최대 인물지향 晋州의 상징 飛鳳山과 鳳卵臺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6.28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충신 정몽주가 비봉산 자락 비봉루에 남긴 시문에
‘地靈人傑姜河鄭 산천좋고 인물걸출…’ 라는 글귀 남겨

조선 500년간 진주출신 정승 9명 배출 ‘인물지향’ 입증
인물탄생과 관련이 있는 곳이 바로 비봉산과 봉알자리

<33>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5>

비봉산
비봉산

5년 전부터 진주시 상봉동 지역민들이 허리 잘린 황새등 밑에서 매년 산신제를 모시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무학대사가 직접 진주에 와서 본 결과, 과연 진주 주변의 지세가 범상치 않아 앞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고하니, 얼마 후 대봉산(지금의 비봉산) 봉새의 허리가 잘리게 되는 운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사실 진주는 예로부터 국지인재지부고(國之人材之府庫)라 하며, “나라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그 반은 진주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았다. 또한 정조 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은 경상도민을 일러 ‘산교악(泰山喬嶽), 설중고송(雪中孤松) 즉 산악의 모습을 능히 바꾸고, 차고 매서운 눈보라를 홀로 견뎌내는 소나무의 절개’에 비유했으며, 또 영조 때 실학자 이익(李瀷)은 경상우도인을 “낙선호의(樂善好義)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기고, 의로운 일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진주 출신 인물론에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상기와 같은 진주인의 평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으로 고려충신 정몽주가 진주에 와서 비봉산 자락의 비봉루에 남긴 그의 시문에 “地靈人傑姜河鄭(산천좋고 인물걸출하니, 강·하·정이로구나”라는 글귀를 남김으로써 진주가 명실공히 전국적으로 최대의 인물지향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조선조 500년간 진주출신 정승이 9명이나 출현함으로써 우리 진주는 역시 말 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명당 인물지향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진주 주변에는 봉(鳳), 황(凰), 학(鶴), 용(龍)과 같은 신령스런 동물과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 많다는 사실은 고려이후 수백년간 이 진주가 소위 전국 최고의 명인출신지향임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그들 중 수많은 인물탄생에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이 바로 비봉산과 봉알자리임이 또한 분명하다.

원래 비봉(飛鳳)은 봉새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봉이 항상 살고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이곳 진주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계속 배출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晋陽志’의 ‘月牙山條’에 이르기를, “산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정승이 많이 나고, 서쪽에는 천마(天馬)의 형국이 있어 위대한 장군(將軍)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다.

오래전에는 비봉산(飛鳳山)을 대봉산(大鳳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진주 강씨들 집안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고, 대봉산 밑에 웅거하여 권세를 부리고 살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대봉산 위에 봉암(鳳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 봉암을 깨어 없애고, 봉새도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하니, 강씨 문중에서는 날아간 봉을 다시 부르려면 알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지금의 위치에 ‘봉알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봉안대(봉알자리)
봉안대(봉알자리)

지금의 진주시 상봉동 911-11번지에 위치한 봉란대(鳳卵臺)는 진주(晋州) 강씨(姜氏)의 성지(聖地)이며, 봉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란 뜻이다. 진주 사람들이 ‘봉알자리’로 부르는 봉란대는 천년고도 진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주 강씨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진주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나라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고구려 멸망 후 통일신라 헌강왕 때 강이식 장군의 후손 강진(姜縉)이 진양후(晋陽侯)로 봉작(封爵)을 받은 이후에 강씨는 본관(本貫)을 진양(晉陽)으로 정했다.

그 후 진주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진양 강씨들은 고려 때 들어와 지역적 기반이 더욱 공고해졌으며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당시 진양 강씨들의 위세는 고려의 중앙 지배 세력들이 위협을 받을 만큼 대단했으며 고려의 지배 세력들은 항상 진주의 진양 강씨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당시 진주 봉곡촌에 있는 강구만(931~975년) 집 뒤에 큰 바위가 하나가 있었는데 이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바위가 얹혀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鳳)의 형상과 같으므로, 사람들은 봉바위(鳳岩)라 하였다. 어느 날 강남도사(江南道士)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 하는 말이 “강씨지대성(姜氏之大姜氏之大盛)이 유차암고야(有此岩故也)라", 즉 “강씨들의 대성함이 이 바로 이 바위 때문이었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강흥(1010~1122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형제 열 한 사람이 경상(卿相)으로서 한 나라의 정권을 한 문중에서 장악하다시피 하였으니 그 부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원이라는 자가 그 세력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강씨를 모함하여 사람을 시켜 몰래 봉바위를 부수니 그 바위 속에서 함박같이 생긴 흰 돌 네 개가 들어 있어 이를 철추(鐵椎)로 부수니 새빨간 피가 흘렀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인종 때에는 척준경(拓俊京)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강홍의 형제들 일당이 불의의 앙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인종은 깜작 놀라 “어떻게 하면 강홍 일가의 세력을 꺾을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척준경은 말하기를 “강홍과 그의 도당(徒堂)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 진주의 명소 지명을 고치소서.” 하니 인종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강홍의 형제와 일족을 죽이고 대봉산의 이름을 봉을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치고, 봉지(鳳池)의 명칭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부지(釜池:가마못)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씨들은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많은 후손들이 번성하고 권력도 회복되어 전날의 선조들의 세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봉알자리는 진주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봉황을 기다리는 염원으로 자리잡아 왔다. 또한 진주 사람들은 봉황의 먹이인 대나무 열매를 마련하기 위해 남강가에 대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봉황이 다시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곳의 지명도 봉곡동·상봉동·봉래동 등으로 지었다고 한다.

봉란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920년부터 찾을 수 있는데 1920년 산청의 강문수(姜文秀), 진주 판문동 강영진(姜永瑨), 진주 봉곡동 강치섭(姜致燮)등이 발의해 봉란대에 시조 강이식 장군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한다. 시조 강이식 장군 유허비(遺墟碑)는 전면에 ‘병마원수 강공이식 유허비’라는 글자를 전서로 표기했으며 윗부분에는 비봉포란(飛鳳抱卵)이란 글자를 전서로 표기해 놓았는데 뜻은 ‘날아간 봉황의 알을 품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 후 봉란대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 일제가 봉란대에 방공호를 파면서 진주 강씨의 성지인 봉란대는 파괴되고 유허비도 넘어지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방치해 오던 봉란대는 1958년 강모학(姜模學)씨가 중심이 돼서 다시 보수를 하여 봉란대 앞에 강모학 표창비(姜模學 表彰碑)를 돌에 새겨 놓았는데, 1959년 3월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주관한 것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