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조선 중기 최고 로맨티시스트 선비 강혼(姜渾)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조선 중기 최고 로맨티시스트 선비 강혼(姜渾)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7.19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60년 진주 월아산 아래에서 출생 성종17년에 출사
김종직의 문하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후에 도승지 대제학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 역임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에 버금갈 정도로 이름 떨쳐
사랑하는 기생에 부임한 목사의 수청 위기에 처하자
기생의 옷에 시를 적어 위기 모면한 일화로 유명

<36> 진주지역 서원(書院)과 선현(先賢) <17>

진주는 예로부터 국지인재지부고((國之人材之府庫)라 하여 ‘나라에 인재를 공급하는 창고’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또 “조정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았다. 특히 충절, 문화, 예술, 교육, 사상가 등 후세 사람들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는 분들이 많았다.

이분들의 삶을 눈여겨 살펴보면, 하나같이 자유, 평등, 정의, 주체의 정신 속에 학문과 문화 예술을 숭상했으며 시대를 정확히 예감하는 가운데 진취적이고 능동적 기상을 가지셨고, 그러했기에 말보다는 행동으로 곧장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분들의 올곧은 정신을 물려받아, 진주인은 자유와 평등, 학문과 문화 예술을 숭상하고 불의를 미워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시대를 정확히 예감할뿐더러 웅혼활달(雄渾豁達)하여 항상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기상을 타고나 관망보다는 행동을,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인물이 대부분이시다.

그런 다양한 인물 중에서 금상첨화로 풍류와 낭만적인 선비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연산군 때 조선 최고의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 선비인 진주지역 출신 강혼(姜渾)의 교방풍류담을 그의 시문(詩文)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강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자.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위치한 강혼(姜渾)의 묘.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위치한 강혼(姜渾)의 묘.

강혼은 1460년 진주 월아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호(士浩), 호는 목계(木溪)이다. 1483년(성종 14년)에 생원시에 장원을 하고, 성종 17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춘추관 등에서 벼슬을 했으며,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물러나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도승지가 되었다. 영의정 유순(柳洵]의 주선으로 반정(反正)에 참여하게 되어 그 공으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진천군(晋川君)으로 봉해진 뒤, 좌승지를 거쳐 대제학, 공조판서가 되었고, 1512년(중종 7년)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뒤이어 우찬성 판충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김일손(金馹孫)에 버금갈 정도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주사람 강혼은 시문에 능통했으며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제학까지 지낸 학자인 강혼에게 ‘기생과의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근원 역시 그의 문집에 있다. 우선 후손이 쓴 가장(家狀)에 그 기록이 있다.

“그 후 목사가 진주에 부임해서 좋아하는 기생에게 수청을 들라 하니 장난삼아 시 한편을 기생의 옷에 써주었다. 목사가 보고 크게 놀라 실용적인 학문을 권하였다.(其後方伯入本州以所眄妓薦枕卽戱題一絶於妓 方伯見之大異遂勖以實學)”라는 글이다.

강혼이 이때 기생의 소매에 써준 시 역시 ‘증주기(贈州妓)’라는 제목으로 문집에 실려 있다.

高牙大纛三軍帥

목사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 같은데,

黃卷靑燈一布衣

나는 한낱 글 읽는 선비에 불과하네.

方寸分明涇渭在

마음속에는 좋고 싫음이 분명할 텐데,

不知丹粉爲誰施

몸단장은 진정 누구를 위해 할까.

강혼은 사랑하는 기녀가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좋아하지만 목사의 권세에 못 이겨 억지로 수청들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한 편의 시를 기생의 소매에 써 준 것이다.

이 시는 “진양지에 이르기를, 판서 강혼이 젊은 시절 관기를 좋아했는데 방백이 부임하여 수청을 들게 하니 공이 시 한 수를 지어 기생의 소매에 써주었다. 방백이 보고 누가 지었는지 물었다. 기녀가 공이 지었다고 대답하자, 불러 보고 크게 칭찬하고 과거공부를 권하였으며, 마침내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주(註)를 달아놓았다.

강혼이 지은 목계일고(木溪逸稿).
강혼이 지은 목계일고(木溪逸稿).

강혼은 풍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문집에 ‘성주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써 준 시 2수도 함께 전한다.

다음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실려 전하는 내용이다. 목계 강혼이 일찍이 영남에 가서 성산 기생 은대선을 사랑했다. 돌아올 때 부산역까지 말을 태워가지고 왔는데 이미 침구를 가지고 먼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공은 기생과 이불도 없이 역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姑射仙人玉雪姿

고야산의 선녀인가, 그 자태 백옥 같구나.

曉窓金鏡畵娥眉

새벽창문 열고 거울 앞에 눈썹 그리네.

卯酒半酣紅入面

아침술에 반쯤 취해 양쪽 볼에 붉어지누나.

東風吹遲綠參差

동풍이 스치니 검은 머리 흩날리네.

은대선은 강혼 시와 편지를 가지고 병풍을 만들었는데 자획이 조화를 이루어서 마치 용과 뱀이 움직이는 것 같았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선비로서 성주를 지나가는 이들은 그 병풍을 구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송계 권응인(權應仁)은 강혼이 세상을 떠난 후 훗날 은대선을 한번 만났는데 그때 은대선은 이미 여든이 넘었다 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검은 머리 흩날리다가 이제는 흰머리 흩날리네로 변했다”고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강혼이 자기에게 써준 시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다.

강혼은 지금 진주에 잠들어 있다. 호방한 기질과 시문에 능한 그였기에 기녀와의 로맨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시대에는 강혼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와 기녀와의 로맨스는 문학 작품으로도 남아 전하고 있는데 바로 교방의 풍류와 멋이라 할 수 있다.

상기 그의 두 작품인 ‘증주기(贈州妓)’와 ‘성주기생 은대선(銀臺仙)’을 봐도 로맨스까지는 잘 상상이 안되지만 흔히 있을 수 있는 ‘선비와 기녀의 사랑이야기’일지니, 진주 관기를 사랑한 강혼은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이 지역 많은 선비들이 기녀와의 로맨스(?)를 남겼을 법한데, 유독 강혼의 이야기만 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는 생각으로 옛 문헌을 찾았다. 우선 강혼의 문집인 ‘목계일고(木溪逸稿)’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 문집은 강혼의 매제(妹弟)인 관포 어득강이 편집한 원고가 유실된 후, 후손인 필수, 태수, 등이 다시 수집해 1910년 진주 원당 유인재(惟人齋)에서 간행한 활자본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대로 988, 4층 (칠암동)
  • 대표전화 : 055-743-8000
  • 팩스 : 055-748-14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선효
  • 법인명 : 주식회사 경남미디어
  • 제호 : 경남미디어
  • 등록번호 : 경남 아 02393
  • 등록일 : 2018-09-19
  • 발행일 : 2018-11-11
  • 발행인 : 황인태
  • 편집인 : 황인태
  • 경남미디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7481400@daum.net
ND소프트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이선효 055-743-8000 7438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