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 을 기리다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 을 기리다
  • 조현웅 기자
  • 승인 2018.11.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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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금서면 소재 덕양전서 추향대제 성대히 열려
기관단체장·문중·유림·주민 등 1000여 명 참석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을 기리기 위한 덕양전 추향대제가 지난 10월 24일 산청군 금서면 덕양전서 각급 기관단체장, 문중·유림, 가락종친, 지역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을 기리기 위한 덕양전 추향대제가 지난 10월 24일 산청군 금서면 덕양전서 각급 기관단체장, 문중·유림, 가락종친, 지역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가락국(금관가야)의 끝을 함께한 마지막 왕, 제10대 구형왕(仇衡王)을 기리기 위한 덕양전 추향대제가 지난 10월 24일 산청군 금서면 덕양전에서 봉행됐다.

이날 제례에는 각급 기관단체장, 문중·유림, 가락종친, 지역주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례인사를 시작으로 상읍례, 분정기 창방례, 덕양전 입전례, 덕양전 추향대제 봉행, 주악, 악지 순으로 치러졌다.

▲초헌관 이재근 산청군수 ▲아헌관 김성철 산청경찰서장 ▲종헌관 권재호 단성향교전교 ▲대축 허종철 유학 ▲집례 김성문 대구광역시종친회장 ▲알자 허태진 유학 ▲찬자 김양수 전)산청향교 전교 ▲사촉 김기준 유학 ▲봉향 김태식 유학 ▲봉로 김쌍근 유학 ▲봉작 김복만 유학 ▲전작 김상겸 전)산청군의회부의장 ▲사준 김규성·김동근·문한순·고선엽 유학 ▲진설 김종완 전)산청군의회의원 ▲척기 김은주 가락국역사관장 ▲식색 김영진 유학 ▲장찬 김기수 가락산청군청년회장 ▲전사관 김도경 대한한약사회부회장, 김시원 경남미디어 사장, 김용주·김연수·김인호·김홍기·김병국 유학, ▲학생 임명규·차동섭·김종회·안대식 유학, 조온환·이완규 전)단성향교전교, 김무광 전)산청향교전교, 김신수 산청향교전교가 각각 맡아 봉행, 헌작했다.

한편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비의 위폐를 모신 곳으로 매년 음력 3월 16일·9월 16일 춘추대제를 봉행하고,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는 삭망향례를 올리고 있다.

 

김수로대왕의 9세손 가락국 마지막 왕

김유신 장군이 증손, 문무대왕이 외증손


◆구형왕은 어떤 왕인가.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의 9세손으로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구형왕은 가락국 9대 겸지왕의 아들로서 서기 521년부터 532년까지 11년 동안 가락국을 이끌었다. 휘는 구형(仇衡), 존호는 양(讓)으로 계화왕후와 아들 세종, 무력, 무득을 두고 있다. 손자로는 신라각간 김서현, 증손 흥무대왕 김유신, 외증손 문무대왕 김법민이 있다.

구형왕은 민본사상의 이념아래 전쟁 없이 신라와 나라를 합병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합병과정으로는 가락국이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정책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이후 신라의 무력 및 회유책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김해의 가락국은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했다.

이후 구형왕은 계화왕후와 함께 왕산으로 들어와 수정궁을 짓고 수년간 은거하다 석릉에 영면했다. 이 수정궁이 덕양전의 모태이다. 1878년 무인년 가락국시조대왕 승선전이 사액됨을 계기로 수정궁 전호를 덕양전으로 바꾸었다. 이후 당시 덕양전이 제향을 받들기 협소하고 부족해 1928년 현재 장소인 산청군 금서면으로 이거하였고, 1989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추모재, 왕산숙, 관리사 등을 중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덕양전 김태훈 참봉(중앙)이 추향대제 봉행을 위해 왕산숙에서 덕양전으로 향하고 있다.
덕양전 김태훈 참봉(중앙)이 추향대제 봉행을 위해 왕산숙에서 덕양전으로 향하고 있다.

 

전(傳)구형왕릉 표기는 역사적 수치

구형왕 유언에 따라 축조된 석총대릉

 

◆전구형왕릉, 본래의 이름을 찾아야

산청군 금서면에 위치한 구형왕의 왕릉. 1971년 2월 국가사적 제214호에 등록된 구형왕릉은 경사진 언덕 중턱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돌무덤이다. 높이 7.15m, 전면 폭 25m의 7단 석총대릉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구형왕릉은 흙으로 덮어진 일반적인 왕릉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는 구형왕의 유언에 따라 석총대릉을 축조했다는 전설이 있다.

유언에서도 알 수 있듯 구형왕은 신라(법흥왕)에 금관가야를 선양한 가야국 마지막 왕이다. 구형왕은 가야를 신라에 선양한 4년 뒤 승하했고, 유언에 따라 석릉에 장례됐다. 하지만 구형왕릉의 정식명칭은 ‘전(傳)구형왕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해 ‘구형왕릉’ 본래의 이름을 확정 받지 못한 것이다.

김태훈 가락국양왕덕양전 참봉은 “전구형왕릉의 표기는 700만 가락종원의 수치다. 고고학 전공 교수들이 현장에 방문하지도 않고, 학술적인 이론만 가지고 전구형왕릉이라 판단하고 있다”며 “왕릉 주위 반경 40km 이내에는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으며, 그 역사 사실은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문헌의 기록에 의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제는 현실적인 조사를 통해서 과학적 근거에 의해 판단해 구형왕릉이라 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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