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충신불사이군 죽음으로 실천한 진주출신 정분(鄭苯)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충신불사이군 죽음으로 실천한 진주출신 정분(鄭苯)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8.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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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때 출사 단종 즉위해 김종서 천거로 우의정에 올라
계유정난때 낙안에 안치되어 관노가 되었다가 사사(賜死)
정인지를 통한 세조의 끈질긴 회유를 끝까지 물리쳐
현재 진주 상대동 소재 재실 영모재서 공의 충절을 기려

<38> 진주지역 서원~~선현 <19>

충장공 정분(鄭苯)을 기리는 진주 상대동 소재 재실 ‘영모재’
충장공 정분(鄭苯)을 기리는 진주 상대동 소재 재실 ‘영모재’

진주출신 또 한 분의 충절인으로서 진양 정씨 정분(鄭苯)을 빼놓을 수 없다. 호가 애일당(愛日堂)이요, 시호가 충장(忠壯)인 정분은 선대 조상으로서 고려말의 충신인 정신중(鄭臣重)을 조부로 모셨고, 조선초기에 판중추부사대제학(判中樞府事大提學)인 정이오(鄭以吾)를 부친으로 모셨던 고려조부터 조선중엽까지 빛나는 가문 출신이었다.

특히 정분은 오늘날까지 진주출신 충절인으로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과 맞서 오직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몸으로 실천했던 분이었다.

정분은 태종 때(1416년)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충청관찰사, 이조참판, 평안도관찰사에 이어 세종 때는 주문사로서 명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후 문종 때는 우찬성 그리고 단종 즉위해(1452년)에는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던 분이다. 이듬해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 때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그도 낙안(樂安)에 안치되어 관노가 되었다가 1년 뒤인 1454년 사사(賜死) 되었다. 그 후 영조 22년(1746년)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관직이 복구되어 장흥의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진주 상대동에도 경남도기념물 제159호인 ‘진주상대동 고분군’에 조부인 정신중 부부, 부친인 정이오 부부와 함께 정분의 부부묘 3대 5기의 묘가 있다.

경남도기념물 제159호인 ‘진주상대동 고분군’에 있는 충장공 정분(鄭苯)의 묘소.
경남도기념물 제159호인 ‘진주상대동 고분군’에 있는 충장공 정분(鄭苯)의 묘소.

충장공은 조선 비운의 왕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수양대군에 맞서 대항하다 노비로까지 전락하여 모질게 살다가 결국은 목숨까지 잃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소재로 널리 알려진 ‘단종과 수양대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수양대군, 김종서, 사육신, 생육신, 한명회, 신숙주 등 이었다. 반면 단종을 보필하던 늙은 대신들은 김종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비춰지면서 한명회의 칼에 의해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 대체적인 줄거리였다. 하지만 역사의 중심을 세종-문종-단종으로 계승되는 쪽에서 본다면, 이들은 만고의 충신이 된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하지요.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충신으로 명성이 드러나기보다는 오랜 기간 역적으로 지내야만 했다.

충장공 정분은 1394년 진주 비봉산 아래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5~6세 때부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부친 문정공이 “우리 집안에 선대의 가업을 능히 이어갈 사람은 이 아이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다. 부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학문에 정진하여 20세 때 ‘충효’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분은 벼슬길에 들어서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22년(세종 4년)에 사간원 우헌납이 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우찬성에 으르면서 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의 성터를 살폈다. 1452년 단종 즉위년에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고 당시 영의정은 황보인, 좌의정은 김종서였다. 이들은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라는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정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 격량 속에서 충장공은 중앙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주로 민생과 관련된 일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계유정란이 일어났을 때도 전라 경상도 체찰사의 직책을 맡아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고 돌아오면서 충주에 머물고 있었다. 충주에서 곧바로 낙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만약 중앙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낙안으로 안치한 것은 그동안 충장공이 백성들을 위해 힘쓴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당시 안평대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현로가 지방에 있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은 낙안에서 다시 광양으로 옮겨져 관의 노비로 전락하고 1년 후 목숨을 잃게 된다. 공은 낙안에 있으면서 세조의 끈질긴 회유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수양대군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정인지가 충장공의 처남이다. 수양대군은 직접, 또는 처남인 정인지를 통해 자신을 섬길 것을 종용했을 것이지만 충장공의 지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단종을 보필하라는 선대왕 문종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양대군은 충장공을 목매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 충장공은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데 당시 상황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전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적소(謫所)에 있을 때 중 탄선이라는 자가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읍내 사람들이 전하기를, 서울관리들이 왔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관원이 공을 잡으러 왔는데 공이 목욕하고 관대를 갖추고 조상의 신주에 재배한 뒤에 신주를 태웠다. 형을 집행하려 할 때 목을 얽으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명분은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쏟아져서 관리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성안으로 돌아갔다.”

충장공은 죽음을 의연한 자세로 담담하게 맞이하였다. 이보다 앞서 충장공의 아내 순비는 대호군 임자번의 종으로 보내지고, 그야말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가 죽은 지 200년의 세월이 지난 1746년(영조 22년)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1786년(정조 10년)에는 장흥의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 충신당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년)에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으며, 충장(忠壯)은 그의 시호이며 호는 애일당(愛日堂 )이다. 그의 고향인 진주 사람들은 도동서원을 세워 충장공을 비롯한 단종조 충절신인 황보인, 김종서, 김문기 등을 배향하였으나, 서원 철폐 때 없어지고 지금은 유허비만 남아있다. 묘소 옆에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는데, 영모재로 이 재실을 들어서기 전 정문 위에는 ‘충신 우의정 진양정공휘정분지려(忠信 右議政 晉陽鄭公諱鄭苯之廬)’라는 편액이 걸려 그의 충절을 말해주고 있으나,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쓸쓸하기만 하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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