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청학이 머물고 있는 진주 천년고찰 청곡사(靑谷寺)
[강신웅교수의향토인문학이야기] 청학이 머물고 있는 진주 천년고찰 청곡사(靑谷寺)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08.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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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갈전 월아산 아래 자리…조계종 해인사의 말사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청학이 날아든 자리’에 창건
몇차례 중수거쳐 조선 말 포우대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국보 ‘영산회괘불도’ 등 소장한 진주 역사문화의 寶庫

<41> 진주지역의 사찰(寺刹) <1> 청곡사 ➀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에 위치한 청곡사 전경.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에 위치한 청곡사 전경.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월아산(月牙山) 아래 자리하고 있는 청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진주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유일한 국보(國寶)로 오랜시간 진주문화를 지켜온 ‘청곡사영산회괘불도(靑谷寺靈山會掛佛圖)’ (국보 제302호)는 청곡사 내의 또 다른 여러 문화재와 함께 진주 역사문화의 보고(寶庫)로 그 역할을 다 해오고 있다.

지금은 국립 진주박물관 내에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 국보제105호)’와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 국보 제324호)’가 최근에 도입 소장(所藏)되어 있지만, 상기 두 국보가 진주박물관에 들어오기 전에는 매우 오랫동안 청곡사의 영산회괘불도는 진주의 자랑스러운 국보문화재로 그 권위와 가치를 크게 인정받아 왔다.

그리하여 본란에서는 ‘청곡사영산회괘불도’이 외에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51호인 대웅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9호인 업경전(業鏡殿), 그리고 목조제석천대범천의상(木彫帝釋天大梵天倚像 / 보물 제1232호) 등 많은 유구한 문화재들이 존재하고 있는 진주 청곡사(靑谷寺)에 대해서, 그것의 역사성과 예술성 그리고 문화재적 가치를 보다 심도 있게 기술 해보고자 한다.

먼저 청곡사(靑谷寺)의 위치와 창건역사, 그리고 그 설화(說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청곡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79년(헌강왕 5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고려말 1380년(우왕 6년)에 실상(實相)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79년(태조 6년) 신덕왕후의 원당사찰이 되어 상총스님에 의해 중창(重創)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년)에 계행(戒行), 극명(克明) 두 스님이 중창했고, 이어서 1612년(광해군 5년) 극명스님이 불상을 새로 조성하였다. 1661년(현종 2년)에 인화 스님이 업경전시왕상(業鏡展示往相)을, 1722년(경종 2년)에는 괘불을 조성했으며, 조선 말에 포우대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했다.

청곡사 대웅전. 조선시대 중수. 경남유형문화재 제51호.
청곡사 대웅전. 조선시대 중수. 경남유형문화재 제51호.

월아산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위로 10여 분 곧장 걸어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오고, 계곡을 건너 누각인 환학루(喚鶴樓)로 들어서면서 경내가 시작된다. 청곡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 전에 도선국사가 우연히 남강을 지나다 남강에 노닐던 청학이 월아산 계곡으로 날아들자 따라와 보니 최고의 명당이라 절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특히 청학은 푸른 학으로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한 상상의 새다. 이 새가 울 때는 천하가 태평하다고 하여 봉황과 더불어 영험(靈驗)한 새로 알려져 있다 하는데, 그러한 청학(靑鶴)이 머무는 곳이니, 청곡사의 위치는 천하의 명당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런 연유로 청곡사에는 학(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특히 대웅전 앞에 위치해야 할 청곡사 삼층탑이 대웅전 옆으로 비켜나 뒤편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학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또 청곡사 아래에는 ‘학영지(鶴影池)’라는 못이 있는데, 이 못의 이름은 학이 달밤에 못에 날아와 앉은 그림자가 그 못에 비춰졌다 하여 ‘학영지’라고 했으며, 달빛에 학이 내려온 곳이라 하여 ‘환학루’라고 했으며, 또 학이 찾아온 다리라 하여 ‘방학교(訪鶴橋)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청곡사가 위치한 산을 ‘월아산’ 또는 ‘달음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달빛이 산을 타고 올라왔다하여 ‘달올음산(달음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렇듯 최고의 명당에 위치한 청곡사이다 보니 청곡사에는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범종각(梵鍾閣)에는 사물(四物: 꽹과리, 징, 장구, 북)의 소리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해 사방중생을 구제하는 법구(法句)들이 있기도 하다. “허공 같은 부처님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통절히 머리 조아립니다. 오직 부처남께서는 가피(加被,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보살핌)를 내리시어 저의 미혹을 열어주소서. 제가 지금 발심하여 진정코 삼매(三昧)를 닦고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 앞에서 손가락 마디 마디를 태우며 큰 소원을 발원하옵나니, 세간의 모든 번뇌(煩惱) 다 벗어나고 오직 결정심(決定心)만을 얻게하여 주옵소서’라는 발원문을 읊으며 자신의 오른손 손가락 열두 마디를 연지공양(燃指供養)했던 일타(日陀)스님의 법구(法句)를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범종각을 지나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 앞의 야단(野壇)에 들어서면, 부드러움과 강함이 어우러져 힘차게 써내려간 대웅전 편액이 보인다. 이 편액은 조선 중기 한석봉(韓錫琫)의 필체라고 전해온다. 낙관이 없어 아쉽게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설에 의하면 감히 높으신 부처님의 대웅전 앞에 자신의 낙관을 찍는 것이 매우 무례하다고 판단하여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 전해오기도 하며, 또 본래는 낙관이 있었으나, 그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새로 건축하면서 낙관은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을 돌아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16나한(羅漢)을 모셔놓은 나한전(羅漢殿)이 나온다. 이 나한전에서는 진묵(震黙)스님의 얘기가 전해져온다. 진묵스님은 도술로서 해인사의 불을 껐다고 할 정도로 재주가 많았으며, 또한 신조어(新造語) 창조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닷가에서 태어났던 진묵스님은 출가하고 나서도 간혹 굴을 먹었는데 바위에 붙어있는 굴을 진묵스님이이 드시는 것을 보고는 동료 스님들이 달려와 만류하자 진묵스님이 답하길, “나는 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석화를 먹고 있느니라” 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술을 한잔 하고 있었는데, 동료 스님들이 와서 걱정을 하자,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곡차를 마시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한다.

다음 호부터는 청곡사에 남아있는 국보인 ‘청곡사영산회괘불도(靑谷寺靈山會掛佛圖)’를 비롯한 각종 다양한 보물급 문화재들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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