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임란 진주성전투 희생자를 위한 제단과 의총 건립 절실 ㊤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임란 진주성전투 희생자를 위한 제단과 의총 건립 절실 ㊤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0.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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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투 1만 · 2차 전투 7만명 순국 불구
4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분들을 위한 안식처는 물론 의총(義塚)도
건립하지 않고 있는 실정에 통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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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진주성전투 결과 병력손실 상황
    3. 2차 진주성전투 순절자들의 성향

㊦ 4. 의총건립의 당위성
    5. 의총(義冢)의 올바른 의미
    6.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의 문제점
    7. 400년 통한의 칠만의총 별곡(別曲)
    8. 결론

1. 서론

천년의 역사, 충절(忠節)의 땅 그리고 전통과 예향으로 이어온 우리 진주인은 과연 상기와 같은 진주의 객관적인 Character에 대한 주변에서의 각종 애칭과 경칭에 대해서 큰 긍지(矜持)와 진정성 그리고 그 존재감(存在感)까지 만끽할 수 있을까?

양심과 진심을 별개로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 진주인은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양심의 가책(苛責)과 함께 자연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이 남겨준 장구한 역사, 충절 그리고 전통에 걸맞은 후속적인 노력도, 연구도 고민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주대첩, 즉 제1차 진주성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세계 전사상 최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1차 전투에서 약 1만명이 전사했고, 제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이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4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분들을 위한 안식처는 물론 의총(義塚)도 아직 건립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외에도 우리 진주의 후손들은 진주의 선열(先烈)들이 남긴 주변의 많은 문화재(文化財)에 대한 심도(深度)있는 연구는커녕 보존조차도 제대로 못한 결과, 초기에 인정받았던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나 등급(等級)조차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나 등급이 매년 훼손(毁損)되고 추락(墜落)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런 사실을 여전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통탄(痛嘆)을 금할 수 없다.

그리하여 본인은 본고에서 진주대첩의 희생자들을 위한 올바른 제단 및 의총건립의 필연적 당위성을 기술하고자 한다.

2. 진주성전투 결과 병력손실 상황

진주대첩, 즉 제1차 진주성전투는 민·관·군의 협력으로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전투였다. 진주대첩은 진주목사인 김시민의 탁월한 지도력과 민간인들의 합심 그리고 효율적인 각종 무기체계의 사용으로 최신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격파한 전투였다. 제1차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여 실천한 김시민 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충절정신, 그리고 목숨을 각오로 싸운 병사와 진주성의 민간인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진주성전투 결과 왜군의 사망자는 지휘관급이 300여명, 병사가 1만여 명에 달했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왜군으로서는 육전에서의 최초의 패배였으며,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던 상황에서 반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리고 제2차 진주성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이 6만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약 10만 명의 왜군과의 벌인 전투로써 진주성의 조선군과 민간인이 성이 함락될 때까지 최후까지 항전하다 모두 순절한 처절한 패전이면서도 장엄한 순국항전의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김천일, 최경회, 황진을 비롯하여 고종후, 이종인, 이잠 등의 지휘부가 이끄는 성 안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끝까지 싸우다 모두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조선의 피해도 엄청났지만 실로 수많은 왜군을 전사케 하는 등 많은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는 하였으나 엄청난 군사적 희생과 물질적 손실로 얼마 뒤 곧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3. 제2차 진주성전투의 순절자(殉節者)들의 성향(性向)

임진왜란 초기 진주성에서는 1592년 10월 초와 1593년 6월(6월21일∼6월29일)에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처음의 진주성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크게 이겼지만, 두 번째의 전투에서는 패전하였다. 그러나 두 전투 모두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살패한 일본군이 다시 진주성를 함락하려고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있고, 곡창 지대인 호남까지 점령하여 병참기지를 구축하려고 했던 의도일 수도 있다. 일본군의 두 번째 진주성 공격이 알려지자 명군 접대를 위해 상주에 갔던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판관 성수경(成守慶)이 진주성으로 복귀하였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약9일 동안 치열하게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도. 두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 8만여명이 순국했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도. 두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 8만여명이 순국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전투의 원인과 과정, 진주성 함락의 요인과 명군의 동향, 전투결과와 향후전쟁에 미친 영향,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기존에는 김천일. 최경회. 장윤. 심우신(沈友信) 등에 대한연구가 있으나 그 외의 순절자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그 후 『忠烈錄』을 통해서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몇몇 사람들의 포상과 배향, 사액(賜額)과 치제(致祭) 등을 연구한 성과와 남명학파 몇몇 인물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있다.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절한 사람은 알려진 사람만 157명이다. 이 중 대표적으로 활약한 29명의 순절자 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보기로 하겠다.

-당시직책-호-본관-출신지, 순서(順序)로 기술한다.

1)김천일(金千鎰), 창의사, 언양, 나주. 2) 최경회(崔慶會), 경상우도 병마사, 일휴당, 해주, 화순. 3) 황진(黃進), 충청병사, 아슬당(蛾述堂), 장수, 남원. 4) 고종후(高從厚), 복수의병장, 준봉(隼峰), 장흥, 나주. 5) 장윤(長潤), 사천현감, ( / ), 목천, 순천. 6) 고득래(高得賚), 우의병부장, ( / ), 장흥, 남원. 7) 문홍헌(文弘獻), 참모관, 송계, 남평, 능주. 8) 이잠(李潛), 적개 의병장, ( / ), 전주, 합천. 9) 양산숙(梁山璹), 종사관, ( / ), 제주, 나주. 10) 송제(宋悌), 당진현감, 매와(梅窩), 남양, 흥양. 11) 정명세(鄭名世), 해미현감, 독곡(獨谷), 진주, 장흥. 12) 강희복(姜熙復), 의병장, ( / ), 진주, 순천. 13) 강희열(姜希悅), 의병장, ( / ), 진주, 순천. 14) 민여운(閔汝雲), 태인의병장, ( /), 여흥, 태인. 15) 오유(吳宥), 부장, (/), 동복, 보성. 16) 심우신(沈友信), 의병, ( / ), 청송, 영광. 17) 유복립(柳復立), 종부시주부, 묵계, 전주. 18) 최기필(崔埼弼), 판관, 모산(茅山), 전주, 진주. 19) 박승남(朴承男), 판관, ( / ), 밀양, 밀양. 20) 장윤현(張胤賢), 수문장, ( /), 단양, 진주. 21) 양제(梁濟), 선무랑, ( / ), 안동, 남원. 22) 김태백(金太白), 수문장, 낭선재(浪仙齋), 용궁, 하동. 23)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 ( / ), 밀양, 진주. 24) 윤탁(尹鐸), 삼가대장, 구산(龜山), 파평, 합천. 25) 김개(金介), 의병, 신암(新巖), 경주, 진주. 26) 송건도(宋(송)健(건)道(도), 의병, ( / ), 은진, 진주. 27) 정대보(鄭大輔), ( / ), ( / ), 진양, 진주. 28) 박세항(朴世項), 수문장, ( / ), 밀양, 진주. 29) 오빈(吳玭), 정자, 성산(聖山), 함양, 광주.

상기의 순절자들은 보다 구체적 분석 대상으로, 총 29명이며, 그 중 호남 출신 16명, 영남 출신 13명이다. 대표적인 의병장과 그들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활동했던 사람 중 사료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여기에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활동양상 등을 중요 의병장인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와 그의 휘하에 있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외 의 순절자들도 살펴보았다. 이들을 통해 나타나는 호남 출신 순절자와 영남 출신 순절자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들의 출신지역과 정치적, 학문적 성향 등을 임란 관련 일기 자료나 각종 문집의 행장이나 실록 등의 공식 기록들을 이용하여 알아볼 수 있었다.

2차 진주성 전투의 순절자들은 호남 출신 순절자나 영남 출신 순절자나 그 지방에서 명망 있는 재지사족이었다. 따라서 의병을 창의하고 전투에 참여할 때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호남 출신 순절자들은 대체로 호남에서 창의한 대표적인 의병장인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와 그들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자신의 고장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를 지키기 위해서 모였다. 호남의 순절자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는 서인계, 학문적으로는 기호학파였고, 국가와 국왕에 대한 충과 효의 유교적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개인으로 의병을 창의하기도 했지만 가문에서 주관하기도 했고, 개인적, 소규모로 활동하는 것보다는 더 광범한 지역에서 의병이 결집되었으며, 부대의 규모도 많이 컸다. 또한 활동 범위 역시 충청도, 경기도, 한성, 경상도 등 광범위하였다.

반면 영남 출신 순절자들은 진주 지방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과 친척을 지키기 위해서 의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2차 진주성 전투 때 참가하였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지역을 벗어난 활동은 많지 않았다. 또한 1차 진주성 전투 때 많이 참여했던 남명학파들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여러 이유를 들면서 참가하지 않았다.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호남 출신 순절자와 영남 출신 순절자들을 앞에서 나열 분석한 29명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면 2차 진주성 전투의 면면을 더 다양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들 모두가 더욱 심층적으로 연구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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