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문제투성이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의총 대신할 수 없다 ㊦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문제투성이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의총 대신할 수 없다 ㊦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0.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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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총(義冢) 건립 아직도 성취못한 건
장구한 진주역사 속에서 크나큰 치부(恥部)
근래에 일부 지각 있는 몇 분들이
의총건립 동분서주 하는 계기 살려나가야

<48> 진주대첩 의총(義塚) 건립의 당위성 ㊦

- 2019년 진주대첩제 및 논개 평론대회 대상작

임진왜란 두차례 전투에서 민·관·군 8만여명이 순국한 현장인 진주성. 출처/진주박물관 팸플릿.
임진왜란 두차례 전투에서 민·관·군 8만여명이 순국한 현장인 진주성. 출처/진주박물관 팸플릿.

<글 싣는 순서>

㊤ 1. 서론

2. 진주성전투 결과 병력손실 상황

3. 2차 진주성전투 순절자들의 성향

㊦ 4. 의총건립의 당위성

5. 의총(義冢)의 올바른 의미

6.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의 문제점

7. 400년 통한의 칠만의총 별곡(別曲)

8. 결론

※이 글은 진주시가 후원하고 진주·사천통합문인협회가 주최한 2019 진주대첩제 및 논개 평론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의 ‘진주대첩(晉州大捷)의 순절자(殉節者)들을 위한 의총건립(義塚建立)의 당위성(當爲性)’이다. / 편집자 주

4~5. 의총(義塚) 건립의 당위성

1592년 4월, 부산 동래에서 수백 명의 군관민이 순절(殉節)했고, 동년 8월 충청도 금산에서 칠백여 명의 의병이 순절했고, 또 이곳 진주에서는 잘 알다시피 1593년 계사(癸巳)년 6월에 칠만여 명의 우리 진주 선열들이 단 한 명의 흔적도 없이 진홍(眞紅)의 빛으로 까맣게 순절했었다.

그러나 당시 동래, 금산, 남원에서는 당시 지역민들이 즉각 그 많은 시신(屍身)들을 거두고 안치(安置)하고 합장(合葬)하여 참담한 그 원혼들의 명복(冥福)을 빌 수 있는 의총을 만들었는데, 이곳 진주는 그 당시는 물론 4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 전사상 최다의 진주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放置)하고 못 본 체해온 그 까닭은 무엇인가?

작금(昨今)에 있어서 진주시의 지각있는 일부 문화단체(文化團體)에서 의총건립을 위한 의지와 운동을 전개(展開)하고 있으며, 진주지역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의총건립에 대한 의지에 동참(同參)해주고 있지만, 아직 그 구체적인 성과(成果)나 인식(認識)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6.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의 문제점

28년 전(1987), 12월에 건립 완성된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라고 하는 진주성 내부의 촉석광장의 서쪽에 위치한 제단(祭壇)은 오늘날까지 그토록 숭고한 선열들의 충정(忠貞)에 대한 진주인들의 진정한 존경과 흠모(欽慕)의 표지(標識)이며, 동시에 진주와 진주인 정신의 지주(支柱)로서 그 역할을 오랜 기간 다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 근자(近者)에 이르러 상기 순의단에 대한 부적절한 설립과정과 그 구조적인 모순(矛盾)에 대한 많은 이들의 지적(指摘)과 논란이 지속적으로 야기(惹起)되고 있다.

그리하여 항상 우리 진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화재에 대한 열정(熱情)과 관심이 많은 분들의 충언과 본인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우리 지역의 여러 문화재에 대한 작은 지식을 토대로, 상기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의 모순과 부적절한 부분을 타 지역의 관련 제단(祭壇)과 각종 사서(史書)와 《예서(禮書)》에 기록된 객관적이고 정통(正統)적인 고전적 자료를 바탕으로 감히 상기 제단에 대한 모순성을 지적 · 기술해보고자 한다.

첫째, 이중제단 설치에 큰 오류(誤謬)를 범하고 있다. 즉, 전쟁의 큰 승리로 타계한 영령과 억울함과 한(恨)으로 타계한 영령을 동일한 장소에 모시게 되면, 후일 후손들이 제사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모셔도 영령의 신들이 결코 강신(降神)하지 않는다.

둘째, 다수 민간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제단이나 무덤에는 그 제단이나 그 무덤에 대한 특별한 호칭(呼稱)이나 명명(命名)은 결코 필요없다.

셋째, 제단이 일단 설치되면 그 제단의 서북쪽에 무덤(塚)이 필히 설치되어야 한다.

넷째, 그 무덤(塚)의 설치는 가능한 개인의 집과 무덤을 만들 때처럼 필히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적합한 명당(明堂)에 모셔야 한다.

다섯째, 많은 이들을 하나의 무덤(塚)에 모시지만 그 무덤 주변은 광활한 면적의 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실제 모든 이에게 개인별로 모실 수 있는 부지가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제단 자체에는 특히 억울하게 돌아가신 다수의 영령들에 관한 당시의 인적사항이나 그 내력에 관해서 결코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다. 특히 당시에 기록된 원문을 번역하거나 더욱이 외국어로 표기해서는 안된다. 그런 내력이나 인적사항은 주변의 신도비나 안내비에 따로 기록해두어야 한다.

일곱째,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제단은 축대와 제단을 만들어 높게 설치하면 결코 안된다. 항상 제사는 아주 낮은 곳에서 낮은 자세로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모든 제단은 바람과 비를 맞는 야외에 결코 설치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타계한 영령들은 저승에서도 보다 안락한 집에 모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제단은 필히 지붕이 있는 구조물 안에 설치해야 한다.

아홉째, 억울하게 돌아가신 많은 영령들의 제단이나 무덤(塚)은 참혹하게 돌아가신 바로 그 자리에 설치하거나 제사를 모셔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훗날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면 선대 영령들이 결코 강신(降神)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번째,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라는 기존의 제단 명(名)이 결코 문장이나 문자적 합리성이 성립될 수 없다. 특히 ‘순의(殉義)’라는 단어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열한번째, 억울하게 타계한 많은 분들을 모시는 무덤(塚), 제각(祭閣) 그리고 제당(祭堂)은 결코 후대 사람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관광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후손들에게 선열들에 대한 충절정신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

7. 400년 통한의 칠만의총 별곡(別曲)

천년의 진주지만, 천고만고의 시름과 아픔으로 우리는 살아왔다. 계사년 6월, 하늘과 땅이 죽음처럼 무너진 그 날! 여기 이곳 초록의 평화로 살아온 진주진양이라는 그 땅이 느닷없이 이웃 살인마의 잔학한 탐욕의 본능인 추악한 살육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묻혀질뻔 했노라.

다시 말하면 지구 역사상 그 선례를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완벽한 초토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하늘을 나는 새, 그리고 땅속의 모든 벌레들까지 그 모두가 일루의 흔적도 없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찌 갚을꼬! 이 원수를 어찌 갚을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선혈의 핏빛 누더기로 죽어간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핏덩이 아이들까지 참혹하게 낭자되매 그 통곡과 아픔의 눈물, 진홍의 피가 남강으로 흘러흘러 푸르디푸른 남강물을 깜깜한 지옥의 강으로 변하게 했다. 420년이 지난 지금도 남강에 가면 7만영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이하리! 이 원수를 어이하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그 때 그 후 진주인들은 그 잔혹한 420년간 무엇을 생각해 왔으며, 무슨 일을 해오며 살았는가! 모든 과거를 잊고 살았는가! 아니면 선대인들의 죽음과 같은 아픔을 잊고 살았는가!

1592년 4월 임진년에 부산 동래에서도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수백 명의 군관민이 순절했고, 동년 8월 금산에서도 의병장 조헌 이하 칠백명의 의병이 순절했으며, 그 후 1597년 7월에 남원에서도 전라병사 이복남과 구례현감 이하 만여 명이 순절했도다.

그러나 당시 동래, 금산, 남원에서는 당시 지역민들이 즉각 그 많은 시신들을 거두고 안치하고 합장하여 참담한 그 원혼들의 명복을 빌 수 있는 의총을 만들었는데, 이곳 진주는 그 당시는 물론 4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세계 전사상 최다의 진주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못본체 해온 그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도 진주의 하늘에는 망자들의 곡소리가 진동하고, 남강은 여전히 진홍의 핏물이 주검처럼 흐르고 있지 않은가?

분하고도 원통하구나! 이 원수를 어이하리! 이 원수를 어이하리! 어이하리, 어이하리, 정말정말 어이하리.

그래도 여전히 칠만의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나 그 건립의 필요성에 대한 절실한 의지가 없다면 진주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수십 년간의 수많은 축제, 예술제 그리고 심지어 각종 제향까지도 향후 지속적인 존립의 가치가 진정 있는지 다시 한번 우리 모두의 깊은 숙고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8. 결론

지금까지 장구한 진주역사 속에서 크나큰 치부(恥部)로 남아있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의총(義冢) 건립을 아직도 성취못한 것이다. 상기에 누차 언급했듯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계사순의(癸巳殉義)를 420여 년 전에 진주의 선열(先烈)들께 이 죽음 같은 아픔으로 경험했으면서도, 그 어떤 명분이나 사유도 없이 지금까지 의총건립을 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 진주를 고향으로 삼고, 진주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를 사랑하는 일부 후대의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늦게나마 근래에 와서 일부 지각 있는 몇 분들이 의총건립의 의지를 모아서 칠만 의총 건립의 당위성과 진주의 진실한 역사를 정립하고자 동분서주(東奔西走) 노력하고 있다는 행보(行步)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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