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일본이 수탈해간 우리의 보물 조속히 돌려받아야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일본이 수탈해간 우리의 보물 조속히 돌려받아야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0.3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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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년(신라 흥덕왕 8년) 황룡사 각명화상이 직접 주도하고
지역민이 합세하여 동(銅)으로 종을 주조하여 연지사에 걸어
연지사 위치 구 배영초교·구 도립 진주의료원 일대로 추정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왜군이 수탈해 가서 조구신사에 봉납
공예품으로의 가치와 역사성이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아
현재 일본에서 국보급 일본중요문화재 제78호로 지정

‘연지사종 반환 국민행동’ 결성 2008년부터 환수운동 펼쳐
통일신라 흥덕왕 8년(833년)에 만들어져 진주 연지사에 걸렸으나 임진왜란 당시 수탈되어 현재 후쿠이현(福井縣) 쓰네미야신사(常官神社)에 보관돼 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연지사(蓮池寺) 동종(銅鐘).
통일신라 흥덕왕 8년(833년)에 만들어져 진주 연지사에 걸렸으나 임진왜란 당시 수탈되어 현재 후쿠이현(福井縣) 쓰네미야신사(常官神社)에 보관돼 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연지사(蓮池寺) 동종(銅鐘).

지금부터 426년 전에 우리 지역의 천년고찰인 연지사(蓮池寺)내에 있던 연지사 동종(銅鐘)을 1593년에 왜군이 수탈해갔다.

그 후 415년이 지난 2008년 2월부터 ‘연지사종환수위원회(蓮池寺鍾還收委員會)’에서 지금까지도 동종환수(銅鐘還收)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지속해온 본 지역에 설립된 ‘동종환수위원회’의 제위 여러분들게 우선 관련 기사의 집필자로써 큰 치하의 말씀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진주의 연지사에 대한 문화사적 역사성과 가치에 대한 기술을 전개하기로 한다.

예로부터 진주성의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기능을 하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연못이 성벽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다. 대사(大寺)라는 절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름의 어떤 큰 절이 있어서 대사(大寺)라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대사지를 일제 강점기인 1909년부터 일본인들이 진주 성곽의 돌과 흙으로 연못을 메워 원형을 훼손하고 상업적으로 활용했다. 그때 당시 연못가에는 연지사(蓮池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연지사는 구 배영초교와 서쪽 중안초교 동쪽의 구 도립 진주의료원까지 형성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연지사(蓮池寺)의 동종은 833년(신라 흥덕왕 8년) 황룡사(皇龍寺)의 각명화상(覺明和上)이 직접 주도(主導)하고 지역민 모두가 합세하여 동(銅)으로 종(鍾)을 주조(鑄造)하여 연지사에 걸어 두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왜군이 수탈(收奪)해 갔다. 오타니 기치류(大谷吉隆)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부하가 1593년 6월 29일에 일본의 조구신사(尙宮神社)에 봉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쿠이현(福井縣) 쓰루가시(敦賀市)에 있는 조구 신사는‘스네미야신사’라고도 하는 오타니가(家)의 전래되는 사설 신사(神社)이다. 종(鍾)의 상대(上帶), 유곽(乳廓)과 유곽 사이에 있는 ‘태화(太和,647∼650, 신라 진덕여왕의 연호) 7년 3월 청주 연지사(太和七年三月菁州蓮池寺)’라는 명문(銘文)으로 미루어 주조 연대와 장소를 알 수 있다. 그 시대에 진주 지명은 청주(菁州)였다. 이동 경로는 동해쪽의 해상로를 통해 쓰루가에서 나고야성으로 물건을 빈번히 실어 나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조구신사는 한반도에서 양잠 기술을 전해준 인물을 제사 지내고 있으며 쓰루가라는 지명도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타니가 조선에서 가져온 연지사종을 쓰루가의 조구신사에 봉납한 것은 그곳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에 출병해 항복을 받아냈다는 삼한 정벌론의 당사자인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이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도 감안됐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연지사 동종은 일본에 남아 있는 50여점의 한국 종(鍾)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크며 공예품으로의 가치와 역사성이 평가되어 일본 교육위원회가 일본중요문화재 제78호로 지정했다. 높이 111㎝, 입지름 66㎝의 그다지 큰 종은 아니지만, 종의 모습을 살펴보면, 용뉴(龍鈕 범종의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가 수직으로 향하여 종정(鍾頂)에 붙이고 여의주(如意珠)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 용에게 아홉 자식이 있는데, 그들 모두 생김새가 다르고 각자 좋아하는 일도 다르다는 설)에 의하면 종에 장식되는 용은 용의 셋째 아들을 포뢰(蒲牢)라고 한다. 포뢰는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 나가게 한다. 포뢰는 겁이 너무 많아 조금만 무서워도 잘 우는데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고래라고 한다. 종을 치는 당의 모양을 고래처럼 만들어 종을 치면 포뢰는 고래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줄 알고 더 크게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종소리가 더 커진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용통(甬筒 종의 음향을 조절하는 음관)은 삼단으로 구성되어 유좌형식(乳座形式)에 연화장식이 둘러지고 연판(蓮瓣)도 다소 형식적으로 둘러지고 있다고 하는데, 유좌형식이란 젖 모양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종신(鐘身)의 하단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이 유곽과 엇갈리게 배치되고 있다. 당좌는 자방(子房 통통한 주머니 모양의 씨방)중심에 성광상(星光狀)의 8관중 엽화문을 배치하고, 그 화문 둘레에 8개의 연자(蓮子)를 표현하였다.

비천상은 신라종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유려하게 조식되었는데 보화형(寶華形) 구름 위에 천의(天衣)자락을 날리며 무릎을 꿇고 주약하는 모습이다. 명문(銘文)은 유곽 사이의 상대에 가깝게 가로 15.6㎝, 세로 8.3㎝의 자리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으로 보아 833년(신라 흥덕왕 8년)에 제작된 종임을 알 수 있으나 연지사의 정확한 소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연지사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에 향후 학계는 물론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 종은 일본에 전해진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범종이자 언젠가는 꼭 돌려받아야 할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다. 끝으로 일본인들이 수탈해간 이 지역의 연지사종을 되찾기 위해 오래전부터(2008년) 지금까지도 진주시민들의 끊임없는 ‘연지사종 반환 국민행동’에 다시한번 크나큰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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