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민영 한국화가
[인터뷰] 정민영 한국화가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1.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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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산과 100개의 폭포를 그리는 게 인생의 목표

주로 산을 소재로 하는 대작을 많이 그려
총 26회의 개인전, 평생 전통 수묵화 고집
조각 전공했으나 귀향한 후 한국화로 바꿔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
경남도청 등 경남의 주요기관들이 작품 소장

진주의 대표적인 산수화가인 정민영 화백은 남은 인생동안 100개의 산과 100개의 폭포를 그려 후세에 남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진주의 대표적인 산수화가인 정민영 화백은 남은 인생동안 100개의 산과 100개의 폭포를 그려 후세에 남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진주에 사는 정민영(58) 화백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한국화가이다. 정 화백은 평생 수묵을 기반으로 하여 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왔다. 그가 산을 주요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대학 때의 경험 때문이다. 정 화백은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에 있는 강릉국립대학에 진학했다. 정 화백은 이때 “이왕 강원도에 온 것, 강원도의 산이나 섭렵을 하자.” 라는 생각으로 설악산을 비롯해 강원도의 명산들을 다 다녔다. 이때 산에 대한 강렬한 경험이 정 화백으로 하여금 평생 산을 화폭에 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정 화백은 자신의 화풍에 대해 대작위주의 수묵을 활용한 웅장한 산수화라고 평했다. 정 화백은 100호 이상의 대작을 많이 그린다. 그 이유는 산을 그리다 보니 아무래도 크게 그려야 제대로 된 모습을 담을 수 있어서 그리 됐다고 말했다. 요즈음은 전통 산수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정 화백은 그러나 자신은 죽고 난 후라도 평생 수묵화의 전통을 고집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진주 주약동의 현 화실에서만 30년 동안 작품을 만들었다는 정 화백은 “희한하게 건물 주인이 6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나가라고 하지 않아 편안하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며 행운에 감사했다. 남은 인생동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100개의 산과 100개의 폭포를 그려서 후대에 남기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6개의 산을 그린데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이 목표를 이룰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 화백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이다. 또 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경남도청과 진주시청, 진주법원, 진주경찰서 등 경남의 주요기관들이 정 화백의 웅장한 산수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정민영 화백 작품 ‘설악운봉’
정민영 화백 작품 ‘설악운봉’

▲지금 정 화백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고 들었다.

-11월 6일부터 11일 월요일까지 창원성산아트홀에서 부스개인전을 열고 있다.

▲부스 개인전이란 게 뭔가.

-여러 화가들이 각각의 부스를 만들어 개인전을 여는 것을 말한다.

▲몇 개의 작품이 출품됐나.

-5개의 작품을 전시했다. 주로 남해안의 한려해상 풍경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몽환적으로 묘사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산수화를 그리는 기법에는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법과 우연의 효과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다. 우연의 효과를 활용해 남해의 한려해상 풍경을 그렸다는 의미이다.

▲우연의 효과를 활용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가.

-아교와 물, 그리고 소금을 이용한다. 물과 아교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소금을 활용하면 소금이 물을 흡수하면서 예상하지 않은 모양들이 나온다. 예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연의 효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연의 효과방식을 이용하는 이유가 무언가.

-사실적으로 그리면 보는 사람이 다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연의 효과 기법을 활용할 경우 몽환적 분위기가 나타나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그런 기법을 활용한 거다.

▲산수화에 그런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가 많나.

-그리 많지는 않다. 이 지역에서는 제가 주로 사용하고 있다. 3년 이상 그 기법을 개발해 왔다.

▲올해 개인전이 몇 번째인가.

-이번으로 세 번째이다. 사천에서 한번 했고 지난 7월 1일부터 8월 30일 까지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초대받아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개인전은 총 몇 번을 개최했나.

-이번까지 26번이다. 산수화 작가로는 많은 편이다.

▲이렇게 다작을 하는 이유가 있나.

-다른 작가들로부터 너무 열심히 하고 너무 많이 한다는 핀잔이기도 하고 격려이기도 한 말을 자주 듣는다. 그냥 제가 주로 그리는 분야인 산이 좋아서 많이 그리는 편이다.

▲대작을 많이 그린다고 하는 데 대작이 무슨 뜻인가.

-저는 주로 100호 이상의 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130cm*160cm을 100호라고 한다. 크기로 치면 약 1평이 조금 못 되는 그런 크기이다.

▲이렇게 주로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뭔가.

-제가 주로 표현하는 것이 산이다. 그런데 산은 화폭의 크기가 커야 그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그래서 대작을 주로 그린다. 크기가 작으면 물체를 표현이 한정된다. 한정된 영역을 뛰어넘어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대작을 활용한다.

▲정 화백의 화풍은 어떻다고 평가되나.

-저는 한국화가로서 산을 주로 그린다. 산의 웅장함, 구름의 빈 여백에서 나타나는 시원함 이런 것들을 주로 표현한다.

▲산을 주로 그리는 이유가 있나.

-제가 대학을 강원도에 있는 강릉대학을 나왔다. 진주에서 강원도에 가서 공부를 하다 보니 대학 다닐 때 강원도에 있는 산들을 다 섭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설악산을 비롯해 강원도에 있는 산들을 다 다녔다. 그 경험이 내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산을 그릴 것인가.

-제 목표가 100산 100폭을 그리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100개의 산과 100개의 폭포를 그리겠다는 말이다.

▲지금 몇 개나 그렸나.

-6개 정도 그렸다. 앞으로 그려야 할양이 많다.

▲어떤 산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구상은 서 있나.

-그렇다. 한국의 명산 100선이란 책도 있고 제가 직접 다닌 산들도 많고 그래서 대강의 구상은 서 있다.

▲100개를 다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다. 산은 다 다르다. 정상 부위만 해도 산들마다 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100개의 산을 표현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지리산 근처에서 태어나 강원도 산들을 주로 다녔다는데. 설악산과 지리산의 차이는 뭔가.

-설악산은 그 앞에 서면 봉우리가 바로 보인다. 그래서 누구나 산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지리산은 다르다. 천왕봉 표지석에서 인증사진 찍은 것은 많아도 천왕봉 자체의 사진은 별로 없다. 그만큼 지리산은 미적으로 그렇게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 지리산의 미적 중요성은 어디에 있나.

-지리산은 계곡에 있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또 그 수도 많다. 이 깊은 계곡이 지리산의 특색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산의 정상부를 표현하는 것보다 계곡을 표현하는 것이 미적으로 훨씬 낫다. 설악산은 산봉우리에서 참맛을 느낄 수 있다면 지리산은 계곡에서 참맛을 느낄 수 있다.

▲100폭은 가능한가. 우리나라에 그렇게 폭포가 많나.

-굳이 웅장하고 유명한 폭포가 아니라도 계곡에 있는 작은 폭포도 훌륭한 소재가 된다. 100개까지 그릴 소재는 충분하다.

▲자신을 어떤 화가로 평가하나.

-제 그림은 약간 전통에 가깝다. 수묵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요즘은 드물다. 지금은 전통산수화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수묵으로 하는 이유는 내가 죽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평생 수묵작업을 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그런 평가를 받고 싶다. 우리나라 전통 수묵의 전승을 잇고 싶어서 이 작업을 한다.

▲개인적인 얘기를 해 보자.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나.

-진주 천전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공작실습을 했다. 찰흙으로 말이나 개 등 동물을 만드는 그런 실습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때부터 공작에 빠졌다.

▲그럼,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미술부를 했나.

-그랬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한국화를 한 게 아니고 조각을 했다. 대학도 조각을 전공했다.

▲대학은 왜 가까운 데를 놔두고 먼 강원도까지 갔나.

-그때 경상대학에 미대가 없었다. 그래서 국립대를 찾아간 거다.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사립대 갈 형편은 되지 않고 국립대학을 가야 했다. 제가 79학번이다. 그때 강릉국립대학이 처음 생겼고 미대가 있었다. 그래서 강릉국립대학을 가게 된 거다.

▲대학 때까지 조각을 전공해 놓고 왜 한국화를 하게 됐나.

-대학을 마치고 진주로 귀향을 했다. 그리고는 화실을 열었다. 그런데 당시는 조각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 또 공간적으로도 조각을 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전공이었던 한국화를 주로 하게 됐다.

▲수입은 어땠나.

-지금보다 옛날이 오히려 나았다. 제 기억으로는 2000년 초반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이 예술에 대한 관심은 더 적어진 것 같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옛날에는 전통가옥도 많았고 또 아파트도 현대적인 것 보다는 전통적인 작품들이 걸릴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런 경향들이 사라진 것 같다. 또 경기도 지금이 더 나쁜 것 같다.

▲경제는 매년 성장하니 않나.

-수치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경제는 옛날이 좋았다. 그때는 좀 흥청망청 하는 기분이 있었다. 요즘은 그런데 없고 너무 빡빡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남의 주요 기관에 정 화백의 작품이 많이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 경남도청에도 100호 작품이 걸려있다. 또 진주시청, 진주법원, 진주경찰서 등 경남도내 주요기관에는 제 작품이 다 걸려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주요기관에 작품이 걸려있는 이유가 있나.

-제가 다른 화가들보다 더 뛰어 나다기 보다는 제 그림은 대작이다. 큰 그림이다. 큰 그림이다 보니 보기에 시원한 그런 느낌을 준다. 그렇다 보니 기관에서 선호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다. 작품의 예술성으로야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더 많지 않겠나.

▲진주에 한국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 초대작가는 진주에서 3명이 있다.

▲어떤 사람들인가.

-저를 포함해서 조원섭 화백, 최연현 화백 등이다.

▲그럼, 그 사람들이 한국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해도 되나.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초대작가가 되려면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이상의 수상경력이 있어야 하고 다른 자격들도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초대작가가 되는 것이니까 일종의 심사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정 화백은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을 언제 했나.

-2010년 선암사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특선을 했다.

대담 황인태 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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