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화. 세종, 장고 끝에 악수를 두다 - 문종과 세자빈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화. 세종, 장고 끝에 악수를 두다 - 문종과 세자빈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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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두 번에 걸친 세자빈 폐위가 훗날 피의 역사 씨앗

 

첫 세자빈 휘빈 김씨 후사 없고 질투심 강해 폐위
둘째 세자빈 순빈 봉씨 동성애에 음주 폭력 심해 폐위
갓 스물의 휘빈 김씨를 2년만에 서둘러 폐위시키지 않고
좀 더 기다리고 기회를 주었다면
훗날 피바람을 불러오는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터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왕실을 튼튼히 하는 요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후손을 많이 생산하는 일이다. 그래서 세종은 18명의 왕자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적자 8명의 대군을 두었으며 후궁에서 서자 10명을 더 두었다. 대통을 이을 세자(훗날 문종)도 많은 왕손을 생산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지사. 그러나 큰며느리로 들인 세자빈 휘빈 김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결국 휘빈 김씨는 이혼을 당하고 쫓겨나게 되었고 이어 두 번째 세자빈으로 순빈 봉씨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녀 역시 불미스런 일로 후사 없이 이혼을 당했다.

세종은 새 세자빈으로 처녀 간택을 하지 않고 후궁 중에서 간택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비록 딸이긴 하지만 이미 세자의 핏줄을 생산한 경험이 있는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뽑았는데 훗날 그녀가 단종을 낳게 된다.

1. 휘빈 김씨, 그녀의 질투심

세자 향(문종)이 14살이 되던 해 세종은 후사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세자보다 4살 위인 휘빈 김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휘빈 김씨의 고모가 태종의 간택 후궁인 명빈 김씨(明嬪 金氏)이니 그녀의 가문은 이미 왕실과 인연이 깊은 집안이었다. 사사로이 촌수를 따지자면 휘빈 김씨에게 태종은 시할아버지이자 고모부인 셈이다.

새 세자빈을 맞이한 세자 향은 체격이 크고 외모 또한 미남이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를 두고 명나라 사신들조차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것을 보면 세자는 상당한 상남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세자에게 가문만 보고 뽑은 휘빈 김씨가 마음에 끌리지 않았던지 세자는 효동과 덕금이라는 두 시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휘빈 김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자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세자빈이 되어 입궁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자 휘빈 김씨를 모시고 있던 시녀 호초가 세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게 된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훔쳐다가 태워서 그 재를 남자에게 먹이면 사랑을 뺏어올 수 있습니다”

세자빈은 두 시녀의 신발을 훔쳐서 그 비방을 써 보려 했으나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텐데 세자가 세자빈의 처소를 찾지 않으니 아무리 좋은 비방인들 세자빈으로서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비방이 필요했다.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시도했다.


「세자빈이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호초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交接)할 때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1년 7월 20일 기사 중에서


휘빈 김씨는 호초가 알려준 비방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 보았다. 결국 그녀의 투기 행각은 뒤늦게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이 일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을 했고 시녀 호초는 참수를 하고, 휘빈 김씨는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한 뒤 출궁 조치하였다. 세자빈으로 입궁한 지 2년 만에 세자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2. 순빈 봉씨, 동성연애에 빠지다


휘빈 김씨가 폐위되자 세종은 다음 세자빈으로 심사숙고 끝에 명문가 중에서 미모를 겸비한 규수를 고르게 된다.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미모를 지닌 세자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맞이한 두 번째 세자빈은 세자와 동갑인 순빈 봉씨였다.

그 무렵 세자의 마음은 후궁인 권씨(단종의 어머니)와 홍씨에게 옮겨가 있었다. 세종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런 세종의 마음이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휘빈을 폐하고 다시 봉씨(奉氏)를 간택했는데, 서로 금슬이 좋지 못한 지가 몇 해나 되었다. 내가 중전과 함께 늘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 후에는 세자빈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르게 되었지마는, 침실의 일까지야 비록 부모일지라도 어찌 자식에게 다 가르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세종 18년 10월 26일 기사 중에서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봉씨는 관심을 끌기 위해 임신을 했다고 거짓소문을 냈다. 세자빈의 임신 소식은 세종뿐만 아니라 종실의 경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거짓이 탄로 날까 봉씨는 두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낙태를 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낙태한 흔적을 찾지 못해 이상히 여긴 늙은 궁녀에 의해 허위 임신임이 밝혀지고 말았다.

세종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폐위하여 출궁시켜도 모자랄 만한 대죄임에도 첫 번째 며느리 휘빈 김씨를 쫓아낸 마당에 또다시 폐위를 논하기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그 무렵 사고는 엉뚱한 데서 터지고 말았다. 세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순빈 봉씨가 급기야 여종 소쌍과 동성연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잠시라도 소쌍이 자리를 비우면 화를 내기 일쑤였고,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순빈 봉씨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녀 소쌍이 다른 여종과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질투를 해서 소쌍을 감시하는 여종을 따로 붙이기도 했다. 이제 질투하는 대상은 세자의 마음을 뺏은 여인이 아니었다. 소쌍과 가까이 하는 시녀라면 모조리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소쌍과 가까이 하는 시녀를 보기라도 하면 봉씨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고 때로는 죽을 만큼 때리기도 했다.

세종이 소쌍을 불러 진상을 조사할 때 소쌍이 진술한 말을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게 동침을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세자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세종실록 세종 18년 10월 26일 기사 중에서>


그녀는 질투심뿐만 아니라 사치도 매우 심했고, 술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으며 술이 모자라면 사가에서 가져와 마시기도 하였다고 실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봉씨는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죽은 지 백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근신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세종은 봉씨의 이런 악행에도 불구하고 쉽게 폐위하지 못했다. 이미 첫 며느리 휘빈 김씨를 폐출한 전례가 있어서 봉씨마저 이혼을 시키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첫 며느리를 쫓아낼 때의 기세라면 동성연애 한 가지만으로도 이혼의 사유로 충분했다.

그러나 당시 궁 안에서 일어나는 시녀들끼리의 동성연애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내명부에선 곤장 70대 내지 100대 정도로 다스렸는데 세자빈의 이런 행동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세자빈의 경우도 시녀들의 전례에 따라 곤장으로 죄를 다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봉씨의 투기심, 음주 행위에 사치심을 더하여 부덕함을 두 차례에 걸쳐 실록에서 언급했다. 그러고 난 뒤에야 마지못하여 폐출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조정에 밝히고 봉씨를 폐출하게 된다.


3. 욕심이 부른 화


장차 국모의 자리에 오를 세자빈의 자격 요건으로는 덕(德)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비록 투기심이 지나치긴 하지만 세자를 품에 안고 싶은 여인의 마음 때문으로 이해한다면 휘빈 김씨에게 더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세종은 휘빈 김씨를 서둘러 폐위하고 출궁시켰다. 2년밖에 기다려주지 못한 세종의 인내심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왕손을 빨리 보아서 왕실을 튼튼히 하고 싶은 세종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세자빈 김씨는 이제 갓 스무 살 젊은 나이가 아닌가?

세종을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 데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은 장차 조선이 나아가야 할 정치 문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애민정신은 끝나고 공포와 피의 역사로 조선은 이어졌다. 그 피의 역사 시작이 바로 세종의 며느리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불행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셋째 세자빈 양원 권씨. 그녀는 누구일까?

*** 다음 이야기는 < 세종, 며느리를 잘 뽑긴 했는데 > 편이 이어집니다.

 

정 원 찬

▶경남 하동 출생
▶진주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중등교사 및 교장 역임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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