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변진 12국’ 중 ‘고순시’ ‘주조마’가 진주권 추정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변진 12국’ 중 ‘고순시’ ‘주조마’가 진주권 추정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1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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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는 삼한시대 토기나 무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삼한시대 당시 작은 나라를 이룰 만한 정치집단 성장 못한 듯

삼한시대 뒤이은 가야시대 역시 가야연맹체 주체에 포함안돼
수정·옥봉, 가좌, 중안동 고분군서 가야시대 무덤 유적은 발굴
진주 수정봉 고분군.
진주 수정봉 고분군.

중국의 정통 역사서(歷史書)인 《三國志》에 따르면, A.D 3세기 후반경에 한반도의 삼한(三韓) 중에, 마한(馬韓)은 오늘날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54개의 작은 나라를,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경상도 지역에 저마다 12개의 작은 나라를 합하여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삼한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마한 지역에서는 목지국(目支國),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斯盧國), 변한지역에서는 가야국(김해)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를 형성했다. 이후 마한의 작은 나라들은 하나로 뭉쳐져서 신라가 되었으나, 변한의 작은 나라들은 뭉쳐지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가 끝내는 신라에 합쳐지게 되었다.

진주지역을 포함해서 낙동강 중·하류의 경상도 서부지역과 경남 해안 일대의 땅에는 변한의 크고 작은 소국들이 일정한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변진 12국’으로 이름이 전하는 변한의 작은 나라로는 미리미동(彌離彌凍), 접도(接塗), 고자미동(古資彌凍), 고순시(古淳是), 반로(半路), 낙노(樂奴), 미오야마(彌烏耶馬), 감로(甘露), 구야(狗耶), 주조마(走漕馬), 안야(安耶), 독로(瀆盧)의 열 두 나라가 있었다. 이 가운데 ‘고순시’와 ‘주조마’라는 나라는 그 위치가 분명치 않아 진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주에서는 삼한시대 토기나 무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삼한시대 당시 진주지역은 작은 나라를 이룰 만한 정치 집단의 성장이나 지역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는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변진 12개 소국 외에도 독립적인 우두머리를 가진 여러 작은 별읍(別邑)들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진주지역은 소국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작은 규모의 독자적 정치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살았다. 성곽을 지어 생활하고 의복과 주거, 언어와 풍속이 진한과 비슷하였으나 제사하는 귀신이 달랐으며, 부엌을 모두 서쪽으로 내어서 살았다고 한다. 변한 사람들은 신체가 모두 크고 깨끗한 의복을 입고 장발 머리를 하였으며 폭이 넓은 세포를 짜서 입고, 법속이 특별히 엄격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가좌동 고분군 2구간 1호 돌넛널무덤 모습.
가좌동 고분군 2구간 1호 돌넛널무덤 모습.

삼한시대에 뒤이은 가야시대(대략 AD 4세기 이후) 역시 진주지역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추정컨대 진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은 3∼4세기에 김해의 금관국이 주도하는 가야연맹체에 포함되어 있었고, 5세기 경에는 경남 서부지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던 함안 아라가야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가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하는 가야연맹체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세기 후반대에 이르러 대가야연맹체의 통괄 능력이 약화되면서 진주를 비롯한 경남 서남부 지역의 가야 소국들은 가야연맹체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멸망(562년)을 마지막으로, 가야 세력은 역사에서 소멸하고 가야권은 신라와 백제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경남 서남부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던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 역시 늦어도 6세기 중반 경에는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이 지역을 다스린 정치세력은 백제와 신라가 서로 다투면서 여러 차례 바뀌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에 관해서도 자료가 부족한 탓으로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다.

진주지역에는 수정동, 옥봉 고분군을 비롯하여 가좌동, 중안동 고분군과 같이 크고 작은 가야시대 무덤 유적이 조사되어 알려져 있다. 수정동, 옥봉 고분군은 일곱 기의 커다란 무덤들이 산의 능선을 따라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고분은 여기서 나온 ‘기꽂이’와 ‘청동합’ 등의 유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수장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기꽂이는 그 용도가 분명치 않으나 경주의 금관총이나 금령총을 비롯한 여러 지역 수장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청동탑도 대개 왕이나 수장의 무덤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진주지역에서는 5∼6세기에 만들었을 듯한 가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돌덧널무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는 있으나 강력한 권력자의 존재를 알려주는 관모나 갑옷, 투구, 대도, 마구류 따위를 이들 고분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보아도 이 시기까지 진주지역에는 강력한 정치 체제가 이루어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진주는 삼한시대의 ‘고순시(古淳是)’ 또는 ‘주조마(走漕馬), 가야 시대의 ’고령가야‘와 같이 이름이 전하는 작은 나라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문헌상의 기록이나 발굴 유물, 유적의 실상으로 볼 때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해는 진주가 통일신라 이후 경상도 지역의 큰 고을로 발전하였으므로, 그 앞 단계에 이미 강력한 정치 집단의 성장이 있었을 것으로 잘못 추정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렇게 지역 성장이 더딘 것은 비단 삼한, 가야시대만이 아니라 가야가 멸망한 이후 삼국이 정립하고 각축하던 시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본다. 이는 삼국시대까지도 진주지역의 사정이나 지역적 위상을 알려주는 당시의 기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진주 역사의 첫 기록이 “진주는 본시 백제 거열성이었는데, 신라 문무왕 3년에 취하여 주(州)를 두었다”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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