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5화. 막내아들 영응대군 두 번 이혼을 하다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5화. 막내아들 영응대군 두 번 이혼을 하다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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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이혼한 첫째 부인 송씨와 세종 사후에 재결합

 

영응대군 12살에 여산 송씨(송현수의 누이)와 결혼했으나
송씨의 성품이 질투심 많고 거칠어서 대군이 두려워해
세종은 둘을 이혼시키고 훗날 경혜공주의 시누 정씨와 재혼
대응대군을 데리고 송현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수양대군
계유정난 성공 후 대응대군 둘째 부인 정씨를 폐출
이혼당한 송씨를 다시 영응대군의 부부인으로 불러들여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왼쪽은 영응대군과 춘성부부인, 대방부부인이 셋이 함께 합장되어 있는 무덤이고, 오른쪽은 셋째부인 연성부부인의 무덤이다.
왼쪽은 영응대군과 춘성부부인, 대방부부인이 셋이 함께 합장되어 있는 무덤이고, 오른쪽은 셋째부인 연성부부인의 무덤이다.(사진=경복궁)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영응대군은 세종의 여덟 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고 음률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막내인 만큼 세종이 그를 각별히 사랑했다. 대군이 겨우 말을 할 줄 알 무렵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조각하여 만든 화촉을 보더니 놀라 말하기를 초가 타면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불이 닿을 것이니 그땐 차마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세종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시 다른 왕자들은 법도에 따라 아버지를 부를 때 진상(進上)이라 불러야 했는데 세종은 영응대군만큼은 15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영응대군에게는 임금이기 이전에 아버지로 불리고 싶었던 것이다.

세종이 병들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는 주로 영응대군의 사저에서 머물렀다. 영응대군 사저는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민가 60여 호를 헐어서 지어준 집인데 그곳을 동별궁이라 불렀다. 결국 세종은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품에서 숨을 거둔 셈이니 행복한 죽음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대방부부인 송씨

영응대군은 12살의 나이에 동갑내기인 여산 송씨에게 장가들었다. 여산 송씨는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훗날 단종의 장인)의 누이이다. 그녀는 혼인한 지 4년 만에 이혼을 당하고 오라버니 송현수의 집에서 얹혀살았다. 이혼 사유는 확실치 않으나 실록에 의하면 질병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그녀에겐 이혼을 당할 만한 치명적인 질병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성품에 대해 실록에 전해지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송씨는 성품이 거칠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인색하고 주위로부터 인심을 얻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사찰과 관련된 일이라면 재물을 아끼지 않는 성품이었다.

처음에 영응대군이 송씨를 사랑하였으나, 송씨의 성품이 질투심이 많고 거칠어서 송씨를 두려워하였다. 영응대군이 어떤 사람에게 헐은 옷 한 벌을 주고 싶어도 송씨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끝내 주지 못할 정도였다. 영응대군이 죽을 무렵에 첩에서 낳은 아들에게 옷 장식품을 주었는데, 송씨가 뒤에 그것을 모두 도로 빼앗아 버렸다. 영응대군이 죽자 송씨는 보물을 팔아서 사찰을 짓는데 보태니, 그 경비가 1백만이었다. - <예종실록> 예종 1년 10월 6일 기사 중에서

위 기사를 통해 미루어 보아 세종은 며느리 송씨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송씨를 내보내고 해주 정씨를 새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막내아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빚어진 세종의 며느리 욕심 때문이 아닐까 추증된다. 왜냐하면 영응대군은 여전히 송씨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새로 맞이한 춘성부부인 정씨는 영응대군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훗날 죽음을 앞둔 세종은 내탕고에 있는 많은 재물을 막내아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내탕고의 보물을 동별궁으로 옮겨 영응대군에게 모두 주었다. 이로써 왕조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영응대군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종 사후, 영응대군은 춘성부부인 정씨를 다시 내치고 친정으로 쫓겨나 있던 송씨와 재결합하였다. 그 많은 재산은 모두 송씨의 재산이 되었다. 송씨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모이기 때문에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제거될 무렵 송씨의 친정 가문도 함께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럼에도 송씨는 살아남았다. 남편 영응대군이 세조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도 화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연산군과 인성대군(훗날 중종)이 어렸을 적에 송씨의 사가에서 자란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오히려 왕실의 보호를 오랫동안 받고 살았다.

영응대군이 34살에 요절하자 일찍 과부가 된 송씨는 불교에 의지하며 살았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기사에 의하면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군장사(窘長寺)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몸종이 잠에 들기라도 하면 몰래 스님 학조와 사통을 하곤 했다. 이 사실을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하게 되는데 연산군은 이를 덮어 무마시켜 버리기도 했다. 세조 이후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던 송씨는 74세까지 살았으며 슬하에는 아들 없이 딸 둘만 두었는데 한 명은 일찍 죽었다.

2.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

영응대군의 새 부인으로 들어온 춘성부부인은 훗날 경혜공주의 남편이 되는 영양위 정종(鄭悰)의 누이이다. 즉 춘성부부인은 경혜공주의 숙모가 되는 동시에 친정동생 정종의 부인이 되었으니 시집 촌수로 따지자면 시누올케 사이가 되는 셈이다.

세종이 죽은 뒤, 수양대군이 권력의 야심을 숨기고 있을 때 수양대군은 영응대군을 데리고 자주 송현수의 집에 드나들었다. 송현수의 집에는 이혼당하고 쫓겨 온 대방부부인 송씨가 오라버니 집에 얹혀살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영응대군을 데리고 자주 드나들었던 이유는 영응대군과 대방부부인의 재결합을 염두에 둔 수양대군의 계산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영응대군은 훗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지지 세력이 되어 주었다.

수양대군이 권력을 손에 쥐자마자, 그러니까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한 달 뒤 수양대군은 단종의 어명을 빙자하여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를 폐출하고 송씨를 다시 영응대군의 부부인으로 불러들인다. 법적으로 완전한 재결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일부 조정 신료들은 춘성부부인의 폐출은 명분이 없는 부당한 처사라고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곤 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수양대군에 의해 묵살되었다.

3. 기구한 운명의 송현수

수양대군의 중재로 송현수의 여동생 대방부부인은 영응대군과 재결합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긴 했지만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충신들을 죽인 이유도 있지만 조카를 몰아내고 임금이 되려한다는 소문이 수양대군을 괴롭혔다. 그래서 흉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수양대군은 고육지책으로 단종의 혼사를 서두르게 된다. 그때 단종의 배필로 수양대군의 친구인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간택되게 된다. 그 왕비가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인데, 대방부부인 송씨에겐 친정 오빠의 딸이니 사사로이 조카딸이 되는 셈이다. 여동생을 영응대군의 부인으로, 딸을 왕비로 보낸 송현수는 장차 권력의 핵심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마음속엔 단종의 혼사는 임시방편일 뿐 결코 마음 내켜 성사시킨 혼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왕도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자 단종을 영월로 유배를 보내더니 기어코 사사하여 죽이고 말았다. 그때 정치적 동반자였고 친구였던 송현수도 단종복위운동에 엮어 죽여 버렸다. 그 질긴 인연은 송현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3. 연성부부인 연안 김씨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는 소생을 낳지 못했다. 재결합한 대방부부인 송씨는 딸 둘을 두었을 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영응대군은 연성부부인 김씨를 측실로 맞이했는데 여기서 1남 2녀를 두었다.

본래 세 부인과 영응대군은 따로 묻혔는데 1900년에 양주군 군장리에 있던 대군의 묘를 지금의 묘역(시흥시 군자동)으로 옮겨오면서 춘성부부인과 대방부부인의 묘도 함께 이장하여 합장을 했다. 이혼을 하고 대시 재결합한 대방부부인, 그로 인해 쫓겨난 춘성부부인, 둘 모두 죽어서는 남편과 합장되어 함께 묻혔다. 그러다가 1968년에는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성부부인 김씨의 묘를 대군의 옆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니 영응대군은 죽어서 두 부인은 품속에, 한 부인은 곁에 두고 묻히는 복(?)을 누렸다.

다음 이야기는 < 세종,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다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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