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근칼럼東松餘談] 지지신독(知止愼獨)과 승산마을
[하동근칼럼東松餘談] 지지신독(知止愼獨)과 승산마을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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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근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전 imbc 사장
하동근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전 imbc 사장

얼마 전에 작고하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생가 마을인 지수면 승산마을에 가면 기신독곡(基愼獨谷)이란 자그마한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이 동네의 텃 주인인 만석꾼 허준 선생의 생가인 지신고가(止愼故家)로 향하는 달도문 앞에 서있는 자그마한 돌비석이다. 지신(止愼)이란 말은 허준 선생의 호이기도 하지만 본래 지지신독(知止愼獨)에서 나온 말이다. 즉 ‘멈출 줄 알고, 스스로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더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야 하며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보다 항상 행동을 삼가고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대학 제6전 성의(誠意)편 고군자필신기독야(故君子必愼基獨也)라는 구절에 어원을 두고 있다. 기신독곡(基愼獨谷)이란 비석은 다시 말해 신독하는 동네를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같은 동네 출신인 구자경 명예회장도 생전 자신의 집무실에 신독(愼獨)이란 휘호를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지수면의 승산마을이 유명한 것은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능성 구씨와 GS그룹의 김해 허씨 집안의 자손들이 대대로 함께 모여 사는 집성촌이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이곳 허씨 집안으로 출가한 누나를 따라 한때 기거한 적이 있다고 해서 이른바 부자들이 많이 배출된 동네라는 점 때문이다. 이 동네는 같은 동네에서 재력과 역사를 갖춘 구씨와 허씨 두 집안이 서로 사돈지간이자 60년 이상 동업 관계를 맺어 아무런 충돌 없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집안의 융성을 이룬 매우 독특한 마을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지금은 폐교된 이 동네 지수초등학교도 한때 한국의 100대 재벌 가운데 30대 재벌을 배출한 학교로 이름을 크게 알리기도 했다. 이들 세 부자 집안은 어쩌면 지연과 혈연에 학연까지 겹쳤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진주에 볼 일이 있어서 내려가는 차 안에서 구자경 회장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언제 한번 가보리라고 마음먹었던 지수의 친구네 방문을 겸해서 둘러본 승산마을에서 의도치 않게 만난 지지신독(知止愼獨)이란 말은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정한 의미였다. 동네 만석꾼인 허준 선생은 그저 부자가 아니었다. 공공사업을 위해 사재를 털어 내놓은 땅, 즉 의장답(義庄畓)을 따로 운영해 흉년이 들면 동네주민들을 구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자제인 효주 허만정은 일제 당시 독립운동단체인 백산상회에 거금을 지원했고, 백정의 신분해방운동단체인 형평사운동에도 자금을 대었다고 한다. 일제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렬사 중수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좌우익 싸움이 심했던 6.25 전쟁 때도 동네 사람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결코 생색이나 칭송을 바라지 않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와 쌓은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사상의 충돌현장에서도 생명을 다투는 중재 또한 가능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명석면 용산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용호정원을 보면서 또 다른 신독(愼獨)을 생각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동네가 재해와 기근이 겹쳐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게 되자 지역유지인 참봉 박헌경이 자신의 재산을 풀어 취로사업 형태로 조성했다는 6백평 규모의 수변 정원이다. 지금도 해마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해 찾는 이의 마음을 추슬러준다. 진주는 참 역사와 교훈이 가득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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