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청주→강주 거쳐 고려초 진주로 명명 거읍으로 성장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청주→강주 거쳐 고려초 진주로 명명 거읍으로 성장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3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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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58> 진주역사의 시대별 인문학적 고찰

4. 진주(晉州)라는 큰 고을(州)로의 성장과정 (하)

 

강주 시기 진주는 신라에 속했지만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특별한 지역-마치 독립국가처럼 행사-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927년(경애왕 4)에 보인다
고려 성종 14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晉州’라는 새로운 이름
경상도 일대를 3개 구역 나눠 그 중 ‘산남도(山南道)’ 관할케
한반도 남동부 특히 남해안 일대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로 부상

현재의 진주시 전경_진주(晉州)의 지명은 통일신라시대 청주(菁州)에서 강주(康州)로 개칭된데 이어 고려시대 성종조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명명된 이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진주가 우리나라 남동부 남해안 일대를 관할하는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사진=진주시)
현재의 진주시 전경_진주(晉州)의 지명은 통일신라시대 청주(菁州)에서 강주(康州)로 개칭된데 이어 고려시대 성종조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명명된 이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진주가 우리나라 남동부 남해안 일대를 관할하는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사진=진주시)

지난 호에 기술했던 진주의 특별한 이름인 청주(菁州)는 100년을 채 가지 못했다.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모든 행정 지명을 중국식 한자 두 음절로 고치면서, 청주는 강주(康州)가 되었다. 9주 체제는 옛 신라영토인 본국 내에 3주, 백제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에 각각 3주를 둔 것이다. 신라의 왕성 북쪽의 당은포로(唐恩浦路)는 상주라 하고, 남쪽은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라 하고, 그 서쪽은 강주라 하였다. 즉 지금 경상도 서남쪽이 진주(康州)의 관할이 된 것이다. 강주의 관할 삼국시대 신라 영역 가운데 가장 나중에 신라에 편입된 지역이다. 진주 관할의 군은 남해, 하동, 고성, 함안, 거제, 궐성(闕城 혹은 江城 ; 지금의 단성), 천령(天嶺 지금의 함양), 거창, 고령, 강양(江陽 ; 大良州郡 혹은 大耶, 지금의 합천), 성산(星山 ; 지금의 성주) 등 모두 11개 군이다. 이들 군 아래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영현(속현)들이 들어 있었다.

강주(康州)라는 이름의 강(康)은 중국의 서북 천산산맥 건너 변방의 강거(康居) 혹은 강국이라는 소국 명칭에서 기원한 것이다. 신라 중앙 정부의 관점에서 당시 진주 땅은 중심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아득한 변방으로 평가하여 이를 반영한 땅 이름을 중국 지명에서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득한 변방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강주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시대 200여년간 계속되었다. ‘강(康)’이란 지명을 중국 역사지리 책에서 찾아보면, 서역(西域)지방의 국가이름으로 ‘강국(康國)’ 혹은 ‘강거(康居)’라고 불리던 곳이다. 이 나라의 위치는 중국 서북방 변경인 천산산맥에서 더 서쪽으로 가서 ‘발하시 호’와 아랄해‘ 사이에 있는 나라 이름이었다. 지금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당나라의 관할에 들어온 적이 있었으나,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역 바깥이 있던 세계에 속한 지명이다.

당시 서울이었던 경주로부터 진주가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으나, 높은 산과 강으로 격리된 곳이며, 삼국이 쟁패하던 시대에는 관할을 다투던 핵심 지역에서 멀리 있어 정보가 부족한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전국의 행정지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 이름으로 바꾸면서 강주라는 중국 서역의 지명을 부여한 이유는 당시 중앙에서 진주가 아득히 멀고 잘 알려지지 않은 벽지로 인식되었고 중앙과의 교류가 적어서 중앙 권력이 잘 미치지 못했던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주 시기에 진주는 신라에 속했지만 중앙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특별한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927년(경애왕 4)에 보인다. 즉 신라가 아닌 중국 후당의 임금이 강주지사에게 벼슬을 내리고 강주지사는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 강주는 독자적으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마치 독립국가처럼 행사하였다는 의미를 담은 기록이다.

즉 “後唐 明宗은 權知康州事 王逢規를 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4월에 권지강주사 왕봉규는 사신 林彦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후당 명종은 그를 中興殿에 불러 대하고 물자를 하사하고 康州 所管인 突山(승주군)등 四鄕을 고려 태조에게 귀속시켰다.”-《삼국사기》 권 第12 新羅本紀 景哀王(경애왕 4년 927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완성된 조선시대 이후, 그리고 현대에까지도 진주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인식되어온 것 같다. 한양길이 진주에서 도보로 보름 정도 걸렸다는 옛날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고속버스로 하루에 왕복하는 지금도 진주가 멀다는 인식은 근현대 대중문화의 영향도 있다. ‘진주라 천리 길’이란 노래가 이러한 이미지를 대표한다. ‘진주라 천리 길’ 노래는 진주 출신의 가수 남인수가 처음 불렀고, 이미자, 남일해 등의 유명 가수들이 불러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 진주 노래이다. 실제 ‘진주라 천리 길’ 노래 가사에는 진주를 나타내는 핵심어까지 들어 있기도 하다. 특히 촉석루와 남강은 천리길 진주를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떠올리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康州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고려의 지방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995년(고려 성종 14)에 晉州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 때 지금의 경상도 일대를 영남, 영동, 산남도 3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진주의 관할구역은 산남도(山南道)이다. 산남이란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 일대의 남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절도사를 두고 진주정해군이라고도 불렀는데, 같은 남쪽의 나주에는 진해군(鎭海郡)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남해안 일대를 진주와 나주가 나누어 지킨 것을 알 수 있다. 진주는 한반도 남동부 특히 남해안 일대의 행정적 군사적 중심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진주 혹은 진양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부터 진주라는 이름은 더이상 변방이라는 의미보다는 한반도 남부의 주요 중심지라는 역할과 위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주의 고유명인 진(晉)은 중국 산서성에 위치하여 춘추시대의 패권(覇權)을 다투던 국가 이름이다. 우리나라 지방 행정지역 명이 신라 경덕왕 이후 중국의 지명을 모방하면서 지방 군현 이름을 많이 가져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행정 지명을 중앙 정부가 지방에 명예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많이 활용하였다. 그러나 국가 이름을 지방 중심지에 부여한 경우는 없는데, 진주는 예외이다. 그만큼 진주가 고려시대부터 전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산수의 아름다움, 물산의 풍요함, 그리고 인물의 융성함, 이 세 가지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 지리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진주에 대한 평가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형승조에, 선인들의 진주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진주의 形勝을 “시내와 산의 경치가 영남제일(嶺南第一)이요, 큰 산과 큰 강이 있어(巨嶽大江) 인물이 많고 ”동방지육해(東方之陸海)라고 부를 만큼 수산(水産)과 토산(土産)으로 나라에 바치는 물산이 영남 여러 주의 절반이다“ 라고 하였다.

진주의 이름은 청주-> 강주-> 진주로 변화해 왔다. 청주는 진주의 기후와 자연을 표현한 이름으로 남방 토산 지형에 무성한 숲과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이 어울린 산수 풍광을 묘사하는 지명이다. 후대에 청주라는 지명은 사라졌으나 진주를 흐르는 강은 청강(菁江)으로 계속 불리면서, 진주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강주라는 이름은 진주가 전국 체제에 포섭되어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중앙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지명이다. 얼마 전까지도 많이 불리어졌던 ‘진주라 천리 길’도 서울 중심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 진주라는 이름은 중국 춘추시대 주요국가인 진(晉)처럼 한반도 남부 지리산 일대의 중심지적 위상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결국 진주는 위치의 중요성, 관할구역의 광대함, 물산의 풍부함과 인물의 번성 등을 포괄해서 전국적 차원에서 차지하는 지역 중심지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진주의 청주-강주-진주 이름 변천은 진주의 위상과 정체성이 시대에 따라 변화함에 따라 이를 반영하도록 이름이 새롭게 부여되었다.

진주의 세 가지 지명이 내포하는 의미는 결코 서로 상충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진주의 정체성의 한쪽 측면을 반영하고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주가 대표하는 생기발랄한 남강의 자연풍광, 강주가 의미하는 서울에서 먼 지방, 그리고 진주가 의미하는 지역 중심지로서 물산과 인물의 풍요함, 이 세 가지 지역성은 일시적으로 어느 한 쪽이 강하게 의식되기도 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실체가 포함하고 있는 세 가지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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