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신라말 호족의 등장으로 진주지역도 급속하게 부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신라말 호족의 등장으로 진주지역도 급속하게 부상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1.0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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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59> 진주역사의 시대별 인문학적 고찰

5. 호족(豪族)중심 고을로써의 진주 <상>

-호족 왕봉규(王逢規)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강력한 지배기구 갖추고 ‘성주’ 혹은 ‘장군’ 자칭
대호족의 경우 하위의 여러 호족을 지배하기도
신라를 배반하고 반란군과 결합할 수 있는 세력으로 존재
고려 왕건에게 귀부한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과
중국과 외교 교섭을 통하여 독립적 정치 권력 구축하려했던
자칭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대표적 인물

 

현재의 진주시 전경_진주는 신라말 중앙의 분열시기를 맞아 다른 9주와 마찬가지로 호족이 성장하면서 또한번 크게 번성한다. 그 대표적 인물로 고려 왕권이 나라를 세우자 귀부한 윤웅과 중국 후당과 해상무역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왕봉규가 있다.
현재의 진주시 전경_진주는 신라말 중앙의 분열시기를 맞아 다른 9주와 마찬가지로 호족이 성장하면서 또한번 크게 번성한다. 그 대표적 인물로 고려 왕권이 나라를 세우자 귀부한 윤웅과 중국 후당과 해상무역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왕봉규가 있다.

한국 역사에서 신라 말엽과 고려 초엽의 시기는 나라 곳곳에서 지방 호족(豪族 :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가문)이 일어나 날뛰는 커다란 혼란기였다. 신라는 8세기 후반기부터 진골 중심의 귀족사회가 사치와 부패에 빠지게 되어 안으로는 중앙의 진골 귀족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격심하게 전개되고, 밖으로는 김헌창 김범문 장보고와 같은 불평 귀족과 군진 세력의 반란이 속출하면서 지배계급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중앙 정권에서 떨어져 나온 귀족이나 지방의 세력가들이 불교 사원, 해외 무역, 군진 세력 등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거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진성여왕 이후 급속히 확대되어 신라는 전국적이고 항구적인 내란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신라 말엽과 고려 초엽에는 전국 각지에서 호족들이 난립하는 시대였으나, 이런 가운데서도 강력한 대호족이 등장하는 곳은 대개 아홉 주와 다섯 소경 지역이었다. 아홉 주와 다섯 소경의 치소에는 경주에서 이주해 온 중앙 귀족이 많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정치, 군사,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풍부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큰 고을로 성장하게 된 진주 지역도 이러한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신라 말엽과 고려 초엽의 혼란기에 호족이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진주지역의 호족으로 기록상 이름이 드러나는 인물로는 우선 윤웅(閏雄)이라는 인물이 있다. 윤웅에 대해서는, “태조 3년(920년) 정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이 그의 아들 일강(一康)을 보내어 인질을 삼게 함으로, 일강에게 아찬을 제수하고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했으며, 낭중(郎中) 춘양(春讓)을 강주에 보내어 그의 귀부(歸附 : 정치권력에 무릎 꿇고 들어와 붙는 것)를 위로하고 회유하였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강주장군 윤웅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하게 된 전후 사정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 해는 왕건이 궁예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 고려를 건국한 지 2년 뒤로서 당시 왕건은 전국의 유력한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고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적극적인 호족회유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다.

윤웅이라는 인물이 ‘강주장군’으로 불린다든지, 그가 아들을 인질로 하여 왕건에게 귀부의 뜻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당시 진주에서 상당한 세력의 기반을 갖춘 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말여초의 호족은 대개 스스로를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지방사회를 사실상 장악하였고, 이들은 흔히 중앙 정치 기구를 모방하여 독자적인 지배 기구를 갖추기도 하였으며, 대호족의 경우 하위의 호족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라 정부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거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신라를 배반하고 반란군과 결합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니 윤웅도 바로 이러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웅의 귀부는 고려 건국 이후 왕건과 지방의 유력 호족 간에 이루어진 회유와 귀부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윤웅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던 것은 당시 지방 호족이 고려 왕조에 귀부하는 전형적인 형식이었으며, 이에 대해 왕건이 측근 신하의 누이동생을 윤웅의 아들과 결혼시킨다거나, 강주에 신하를 보내어 그의 귀부를 위로하고 회유하였던 것은 귀부한 호족에 대해 고려 국왕의 전형적인 포섭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왕봉규 관련기록
삼국사기의 왕봉규 관련기록

윤웅에 이어 기록에 나타나는 인물로는 왕봉규(王逢規)라는 이가 있다. 그는 고려 건국 직후 고려에 귀부한 윤웅과는 달리 중국과 외교 교섭을 통하여 진주 지역을 기반으로 독립적 정치 권력을 구축하려했던 인물이었던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이름이 기록상 처음 나타나기는 경명왕 8년(924) 정월에 신라에서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할 때, 그 또한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라는 직함으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천주는 당시 강주 관내에 있었던 의령의 옛 이름이며, 절도사는 당시 신라의 관직에는 없었던 것으로 당시 지방 호족들이 ‘성주’ 또는 ‘장군’으로 자칭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칭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절도사는 당으로부터 오대에 걸쳐 지방 요지에 두었던 지방군 사령관으로, 지방의 군권과 정권, 재정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독립적 세력으로 지방을 할거하던 존재였다.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이 일어난 것은 이들 절도사의 발호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였다.

스스로를 천주절도사로 자칭한 것으로 보아 왕봉규는 의령 출신 인물이었거나, 의령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구축한 인물로 보인다. 여하튼 왕봉규에 관한 기록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사신을 보내 후당에 조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후백제와 고려는 비록 지방 정권이기는 하나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으므로 중국과의 국교를 가질 만하였지만 천주절도사를 자칭하는 일개 지방 세력자가 신라 조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후당과 외교 교섭을 행하였다는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친 3년 뒤인 경애왕 4년(927) 3월에 후당의 명종은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고, 이에 왕봉규는 다음달 4월에 임언(林偃)이라는 인물을 후당에 보내 조공을 하였으며, 후당의 명종은 그가 보낸 사신을 궁전에 불러 접견하고 하사품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때 왕봉규는 종전의 천주절도사에서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또는 ‘지강주사(知康州事)’로 직함이 바뀌고 있어, 그의 세력이 이즈음 강주 일대에 세력을 떨치는 대호족으로 더욱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가 후당과 독자적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고려 건국 직후 강주장군 윤웅의 귀부와는 다른 노선의 호족 세력의 동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곧 고려와 후백제가 각축을 벌이는 후삼국 전쟁의 와중에서 진주 지역을 신라, 고려, 후백제의 어느 정권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 세력권으로 구축하려는 기도가 중국과의 외교 교섭으로 전개되었던 것 같다. 한편 당시의 정세로 보아 그의 중국에 대한 외교가 해로를 통해야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그의 세력 기반이 해상 활동을 통해 구축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해상 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각지의 물화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당과의 해상 교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면서 통일신라는 중국의 발달된 문화와 경제의 영향을 받기에 이른다. 이에 따른 문화 생활의 향상과 생활 상태의 변화는 물품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당시는 조공을 통한 공무역뿐만 아니라 민간의 사사로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사무역은 주로 해안지역의 지방 세력에 의하여 해상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해상무역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신라 하대에 이르러 한층 발전하였다. 왕봉규는 이러한 시대적 여건 속에서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이루어 강주 지역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인물로 보인다.

지강주사 왕봉규가 진주 지역을 기반으로 독립적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후당에 사신을 보내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는 이해(927) 4월에 왕건은 해군 장군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강주를 치게 하였다. 이때의 침공으로 강주 관내의 남해군에 있던 전이산, 노포, 평서산, 돌산 등 네 고을이 항복하였으며 많은 인물이 노획되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8월에는 왕건이 친히 강주 관내의 한 성을 순행하여 이곳 성주의 항복을 받아내며, 이에 백제에 귀부했던 인근의 여러 성주들이 모두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큰 고을 강주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대호족 왕봉규는 강주 관내 남해 일대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고려에 귀부한 강주 관할 아래의 상당수 군현 지역은 이후 후백제의 공략을 받아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고려는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이듬해 1월 원윤 김상(金相), 정조 직량(直良)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보냈으나, 이들 지원군은 초팔성(지금의 합천 초계)을 지나다가 이곳 성주 흥종(興宗)에게 패하였고 이때 김상 등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외원군 지원이 끊어진 이해 5월에 강주의 원보 진경(珍景) 등이 양곡을 고자군(지금의 고성)으로 운송한다는 정보가 견훤에게 알려지면서 강주가 습격을 받았다. 이 때 진경 등이 돌아와 싸웠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300여 인이나 되자 강주 장군 유문(有文)은 마침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강주는 견훤의 두 아들(신검과 양검)의 치제하에 두었으나, 두 아들의 갈등의 와중에, 결국 이들 두 아들이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936) 진주는 마침내 고려에 부속되었으며, 이로써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큰 고을 진주를 기반으로 한 몇몇 호족의 동향을 통해서 볼 때 후삼국시기 진주 지역은 고려 건국 직후 일찍이 고려에 귀부했던 지역으로 나타난다. 그 뒤 왕봉규의 중국 외교에서 보듯 진주 지역은 한때 고려나 후백제의 어느 정치권력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 독자적 세력화의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한때 고려의 침공을 받아 고려에 투항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말기에 이르러 후백제의 판도 내에 들었다가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지역으로 나타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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