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고려조 진주 본관 일곱 성씨 중 강·하·정 번성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고려조 진주 본관 일곱 성씨 중 강·하·정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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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3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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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진주역사의 시대별 인문학적 고찰

7. 진주지역 토박성씨(土薄姓氏)와 인물 <상>

강(姜), 하(河), 정(鄭), 소(蘇) 네 성씨는 토성(터박이성)
유(柳), 임(任), 강(康) 세 성씨는 고려 건국 후 성립
네 개 토성은 진주 중심지에 일찍부터 토착했던 성씨로
진주가 큰 고을로 발전하면서 확대된 행정 업무에 참여
동국여지승람에 진주출신 고려조 ‘인물’로 열두 사람 기록
(강씨-민첨, 창서, 인문, 시, 회백) (하씨-공진, 을지, 즙, 윤원, 륜) (정씨-을보, 이오)

 

진주의 유력한 성씨 중 하나인 진주 강씨의 대표적 인물인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해 있는데, 경남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의 유력한 성씨 중 하나인 진주 강씨의 대표적 인물인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해 있는데, 경남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에서 중국처럼 한자로 성(姓)을 쓰는 풍속은 옛날 왕실로부터 시작해서 중앙 귀족, 지방 호족, 양민, 천민의 차례로 확대되어 나갔다. 7세기 후반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 계층이 점차 한자로 성을 만들어 썼으며, 통일신라에 이르러 아홉 주와 다섯 소경에 서라벌의 귀족이 이주하게 되면서 한자의 성을 가진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후삼국 시대에 이르면 각지의 지방 호족들도 성씨를 쓰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유력한 씨족이 서로 연합하여 고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도 하였는데, 스스로 송악 지방 호족 출신이면서 전국 각지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후삼국 통일을 이루어낸 고려 태조는 통일 이후 여러 고을의 유력한 성씨 집단으로 하여금 소재지 고을의 지방 행정을 담당토록 인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려 왕조에는 지방의 읍사에 참여하여 지방 행정을 담당하도록 용인된 성씨 집단이 고을마다 있게 되며 이를 토성(토박이성)이라고 하였다.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 향리는 모두 이들 토성에서 나왔으며,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료를 배출하는 지방 출신 인물들도 대부분 토성 출신이었다.

진주지역의 유력한 성씨 집단은 처음 강(姜), 하(河), 정(鄭), 소(蘇)의 네 성이었으며, 뒤이어 유(柳), 임(任), 강(康)의 세 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가운데 강, 하, 정, 소의 네 성은 토성이며, 유, 임, 강의 세 성은 주(州)가 성립한 뒤에 나타난 성씨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주가 성립된 시기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통합한 다음 강주로 고을 이름을 고쳐 정한 태조 23년 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강, 하, 정, 소의 네 성과 유, 임, 강의 세 성이 이렇게 시기에서 앞뒤를 보이는 것은, 네 개 토성은 진주의 중심지인 읍내에 일찍부터 토착했던 성씨 집으로 진주가 큰 고을로 발전하면서 확대된 행정 업무로 말미암아 뒤늦게 읍사에 참여하게 된 성씨 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의 유력 씨족들은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건과 견훤 사이를 왕래하면서 시대의 진전에 부단히 적응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하공진, 강민첨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나 고려 중기에는 다소 침체하였다. 진주 토성들이 중앙에 크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최씨 무신 집정 시기를 계기로 해서(楷書)였다. 최충헌의 외가가 진주 유씨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주는 그의 식읍이 되었고, 최씨 부자가 임금에게서 받은 읍호도 진강공(晉康公)이었다. 이리하여 최씨 정권 아래 유씨 일문에서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고, 이에 따라 진주의 다른 토성들도 이때부터 활발히 중앙로 진출하였다.

강씨는 후대 족보에서 강민첨을 시조로 하는 계열과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강이식 계열로 구분되지만 원래 진주강씨는 진주의 토성 이족(夷族: 지방 관리를 하는 집안)에서 분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 강씨 가운데 최고의 문벌을 자랑하는 강시(姜蓍)의 후손들도 모두 고려 후기 호장의 아들로서 장원급제한 강창서를 선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강창서의 자손은 족세가 번창하여 조선 초에는 훈구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진주 강씨의 시조격인 강민첨은 거란 방어에 대공을 세워 고관이 되고 공신에 봉해졌다. 고려는 그의 공덕을 기려 진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던 것으로 전해지며, 그를 제사하는 사당을 ‘주사(州司)’에 세우고 매년 본 고을의 호장(戶長)이 고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제사를 봉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토성 인물 가운데 본 고을에 공덕을 끼친 인물을 선정하여 그 지방의 수호신격으로 봉사하고 토성 호장으로 하여금 이를 주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씨는 하공진(河拱辰)의 벼슬 진출로 분화되어 그의 자손은 재경 관인이 되었고, 재지(在地) 세력은 이족(異族)으로 내려오다가 여말에 다시 사족(士族)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하공진의 후예는 공음(功蔭)으로 관인 신분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그 족세는 미약하였고 그 대신 재지 세력에서 하윤, 하연, 하경복 등의 선대 가문이 여말 선초에 걸쳐서 인물을 배출시켰다.

정씨는 크게 여섯 파로 갈라지는데 그 여섯 계파가 모두 진주 이족에서 나왔다. 정씨도 하씨, 강씨와 같이 고려 시대를 통하여 여러 인물이 차례로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하였다. 인종 때 정지원이 개경에 유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랐으며, 뒤따라 정발과 정척 가문이 여말 선초에 걸쳐 차례로 이족에서 사족(士族 : 중앙 정부 관리로 나갈 수 있는 집안)으로 성장해 갔다. 진주의 이족 가운데 정씨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는가는 ‘고려사’ 정방의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 신종 때 진주 향리 정방의가 족당을 동원하여 관가에 대항하고 한때 고을을 휘저어도 지방관이 다만 두 손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반란은 나중에 토평되지만 이를 통하여 당시 진주 이족들의 강성했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일곱 성씨 가운데 강(姜), 하, 정씨는 번성하여 재경(在京) 관인과 재지(在地) 세력이 다같이 강성하였으나 소씨와 임씨, 강(康)씨는 족세가 미약하였다. 조선 성종 때에 편찬한 ‘東國輿地勝覽’에는 진주 출신 고려조의 ‘인물’로 진주 강씨 인물이 다섯 사람(강민첨, 강창서, 강인문,강시, 강회백), 진주 하씨 인물이 다섯 사람(하공진, 하을지, 하즙, 하윤원, 하륜), 진주 정씨 인물이 두 사람(정을보, 정이오), 모두 열두 사람으로 나타난다.

상기 열두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 인적 사항과 인물론에 대한 내용은 다음 호에서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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