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의세상엿보기] 자비와 자유
[김용희의세상엿보기] 자비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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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0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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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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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 주말의 명화 ‘브레이브 하트’ 1280년 스코틀랜드 월리암 웰레스의 독립투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얘기다, 1995년작. 잉글랜드 왕 롱 생크에 저항하다 배신과 음모 혹은 나약해진 스코틀랜드의 운명 앞에서 굴종보다는 자존을 지켜서 고통스런 처형을 맞은 월레스(웰 깁슨)의 얘기다. 잉글랜드 공주 이사벨(소피 마르소)과의 사랑얘기도 곁들여져 영화의 재미를 구성해 간다. 그가 처형되기 전 고통을 줄여 주겠다는 법집행관의 마지막 거래 제안인 자비(Mercy)를 구하라는 한마디를 끝내 거부하고 외친 자유(freedom)란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 영화다.

영국은 3개의 군주국가의 연합이다.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는 독립국가연합의 형태를 띄고 있어 잉글랜드와는 다른 독자적 법률을 가진다. 아일랜드는 독립되었고 북아일랜드의 일부 주만 영국령이 된 상태다. 십수년 전 영국여행 당시 한밤중에 테러 위험소동으로 숙소에서 대피한 기억이 있다. 지금 기억으로 그날의 소동은 북아일랜드의 독립투쟁문제였던 것 같다.

영국 어떤 나라인가? 크롬웰의 시민혁명이 근대화 시민혁명의 효시가 되었던 나라,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처형 등 나름 인간욕망의 투쟁사가 어느 나라처럼 진행되어 왔지만 자발적 민주의식이 가장 먼저 발현된 국가 아니던가? 물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자본가들이 나타나면서 자유사상가들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시민혁명이 완성되었지만 어쨌든 시민이 처음으로 주인되는 변화를 시도한 그 자존심은 영국인의 것이겠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윌리엄의 얘기는 국가간 독립을 주제로 한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도 시사하는 측면이 크다. 당시 스코틀랜드를 배신하고 잉글랜드 롱 생크에 붙어먹은 군주들은 우리의 친일파와 다르지 않겠다. 그러나 영국의 역사는 스코틀랜드의 시각으로 쓰여졌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동학은 성공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인 시각으로 역사도 기술되지 못했다.

‘자비’보다는 ‘자유’를! 독재자의 자비를 구걸하기보다는 자유 그 무한의 열린 인권을 선택하는 그 기상과 기질이 오늘의 스코틀랜드를 만들지 않았을까. 브레이브(Brave)가 용맹(勇猛)이란 의미이니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권력자의 자비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원할 것인가?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누구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관계로 짜여진 우리 사회의 현실, 공천을 받아야 의원출마가 가능한 것부터가 그렇다. 정당정치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니까 무소속이면 힘을 얻지 못하는 정치현실, 당선된 연후에라도 정당소속이 되어야 무리짓기가 가능한 것은 비단 우리의 정치현실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집단의 힘’이라는 것이 결국 자당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니 어쩌랴.

기업체도 직원이 사장과 부장의 자비를 구하는 상황이고, 민노총 소속 현대차 노조의 급여는 일억원대, 하청·재하청회사 직원은 2천만원대, 이것 없애자는 광주형 일자리는 이제 그 취지도 잊어버린 상태. 이렇게 가면 그것은 분명 자유가 아니다. 권력자의 자비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자의 자비가 필요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물론 어떤 제약도 없는 무한의 자유상태가 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으로 흐를 우려도 있다.

성숙한 사회는 ‘자유(自由)’보다는 ‘자율(自律)’이 맞겠다. 싱가폴대학 아시아 1위인 것은 교수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이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교수들을 탈락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논리이며 나아가 자연의 질서다. 자본주의는 보수적 가치이며 보수적 가치는 자연법을 따른다. 때문에 비현실적이지도 않고 이상주의의 달콤한 환상에만 빠지지도 않는 현실적 이상주의가 맞겠다. 비현실적 이상사회! 그것은 역사상 실패로 검정된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따뜻한 자본주의다. 지금은 이 두 가지의 이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섞어서 난리법석이다. 그건 과거 정권이 세뇌시켜 만들어 준 유물이다.

자유로운 경쟁, 그러나 패자에게도 애정을 갖는 경쟁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인류가 최종 개발한 시스템이겠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는데 역사가 너무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데 아직도 우린 어두운 밤이다. 권력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시대는 이미 17세기에 끝났는데 아직도 자비를 구해야 하는 사회 환경이라면 슬프다. 그렇다고 경쟁을 거부하는 절대적 평등주의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몽상병 환자다. 주말 영화 한 편으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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