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9. 조선 초기의 진주지역의 성장과정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9. 조선 초기의 진주지역의 성장과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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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2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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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연간 일시 ‘진양대도호부’로 승격(진주는 현비 강씨의 외향)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 목-부-군현 중 진주는 계속 ‘목’
진주 목사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직위 겸하였으며
합천, 초계, 함양, 곤양 등 4군과
사천 남해 삼가 의령 하동 산음 안음 단성 거창 등 9현 관할
고려시대에 비해 관할 영역이 조금은 축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상도 지역 계수관(界首官)으로서 역할하며 발전
현재의 진주시 망경산과 강남, 칠암, 주약동 일원의 모습.
현재의 진주시 망경산과 강남, 칠암, 주약동 일원의 모습.

진주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에 비해 관할 영역이 조금은 축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상도 지역의 계수관(界首官)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주목 자체의 영역이 매우 넓었다. 특히 진주는 태조 현비 강씨의 외향이라 하여 태조 연간에 일시 진양대도호부 승격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진주는 고려조에 이어 조선시대 거의 모든 시기를 통해서도 목사가 부임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계수관 지역으로 줄곧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진주의 행정구역은 고을의 규모와 행정상의 지위에 따라 목, 부, 군현으로 구획되었고, 이들 고을 수령은 거기에 대응하여 최고 종이품에서 최하 종육품에 걸쳐 파견하였다. 조선조 당시 진주목이 차지하는 지방 행정상의 지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진주의 고을마다 각급 수령의 관등에 따라 인적 구성과 물적 정액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각급 수령의 관등에 따라 부여되는 인적, 물적 혜택은 법제상 정해진 것으로 실제로는 고을 세력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수령은 행정 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는 직속 상관인 감사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다만 수령이 겸하는 군직(軍職)으로 말미암아 수령 사이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진주는 경상도 지역 여섯(경주, 안동, 대구, 상주, 진주, 김해) 진관의 하나로 진주 목사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직위를 겸하였으며, 합천군, 초계군, 함양군, 곤양군의 네 군과 사천현, 남해현, 삼가현, 의령현, 하동현, 산음현, 안음현, 단성현, 거창현의 아홉 현을 관할하였다.

조선 왕조는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통치를 철저히 추구하여, 수령 중심의 지방 통치에 방해가 되는 토호의 품관층과 향리 세력을 억제하였다. 수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국가 안위나 불법 살인을 제외한 수령의 잘못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의 품관(品官)이나 향리의 고소가 있더라도 불문에 부치는 대신 수령을 고소하거나 거짓으로 헐뜯는 부민은 중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현비 강씨. 사진 KBS 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현비 강씨. 사진 KBS 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그런 한편 주민의 신앙 체계까지도 관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통제하여, 모든 고을에서 거행할 제사 의례를 일률적으로 지정하고 이를 수령이 주재하도록 하였다. 고을마다 진산(鎭山 : 고을을 지켜주는 으뜸 산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을 지정하는 한편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 사직단(社稷壇 : 땅서낭인 ‘사’와 곡식서낭인 ‘직’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 성황사(城隍祠 : 고을 서낭님을 모신 당집), 여단(厲壇 : 여귀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 여귀는 외롭고 원한 맺힌 혼령)등을 설립토록 하고 종래 잡다한 민간 신앙은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로 규정하여 금단했다.

진주에서는 비봉산을 진산으로 지정하였으며, 주의 서쪽 5리 대룡사 뒤쪽에 사직단을, 고을 북쪽 1리 의곡사 뒤쪽에 여단을 만들었고, 향교에는 문묘를 설치했다. 이 밖에 진주에 속한 지리산과 옥산을 명산, 남강과 두치진을 대천으로 지정하여 고을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특히 진주성 내에 있었던 진주 성황(城隍)은 개국 초에는 조정에서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행하도록 할 만큼 중요시하였다. 이렇게 고을 단위로 행해진 제사를 수령이 주재함으로써 수령은 명실상부하게 고을을 대표하였다. 또한 고을마다 국왕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지방관민이 여기에서 군신 관계의 의식을 수행하였는데, 진주 객사는 비봉산 아래 고경리에 자리하였다.

당시 진주목의 영역이 매우 넓어서,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경계로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 구례군 지역과 전라북도 남원시의 산내면과 이웃하여 요즈음의 하동군 하동읍(그 당시는 진답리라 하였음)과 화개, 악양, 적량, 옥종 청암면 대부분 지역이며 횡천강 일부가 진주에 싸잡혀 있었다. 동쪽으로는 고성군 영오, 영현, 개천면과 마산시 진전면의 일부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사천시 축동면과 삼천포 부근 일부 지역은 말할 것이 없고, 바다 건너 남해군 창선리면까지도 진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북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요즈음의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금서면 지역과 이웃하여 지금의 산청군 시천, 삼장면과 단성면의 사월, 소남, 관정, 창촌, 백운, 당산, 자양리까지 진주목에 들어 있었다.

이렇게 넓은 진주목 영역은 읍내 열네 마을(리), 동면 스물네 마을, 남면 스물여덟 마을, 서면 서른두 마을, 북면 열세 마을로서 모두 일백열한 마을이 내부 행정 구역을 갖추고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임진왜란 후의 진주지역의 범위를 ‘진양지(晉陽誌)’에 의해서 보다 구체적인 풍속과 거주 현황에 대해서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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