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달연 경남농업기술원 원장
[인터뷰] 최달연 경남농업기술원 원장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2.2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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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농업기술원 112년 만에 첫 여성원장으로 취임

1984년 통영시 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직으로 공직에 들어와
욕지도 등 섬에 다니며 여성들 교육하는 것으로 공직생활 시작

기술원 계장 때 농촌교육농장 활성화한 것 가장 기억에 남아
원장으로 곤충산업 발전위해 연구소 설립하는 게 남은 목표

 

최달연(59) 농업기술원 원장은 기술원 설립이래 112년만에 탄생한 여성원장이다.
최달연(59) 농업기술원 원장은 기술원 설립이래 112년만에 탄생한 여성원장이다.

최달연(59) 경남농업기술원 원장은 기술원이 설립된 이래 처음 취임한 여성원장이다. 경남농업기술원이 1908년 진주종묘장으로 설립이 됐으니 112년 만에 여성원장이 탄생한 것이다.

최 원장은 1984년 농촌지도직으로 통영시 농업기술센터에 발을 디뎠다. 처음 공직에 들어온 후 최 원장이 한 일은 농촌을 다니며 여성들을 생활개선 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당시 “밥만이 주식이 아닙니다. 감자, 고구마를 많이 먹읍시다”라는 구호 아래 식생활 개선 교육을 주로 실시했다. 쌀이 모자라던 시절이라 쌀의 자급도를 높이기 위해 잡곡을 많이 먹자는 뜻이었다. 지금 들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은 이야기인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교육이었다.

이 교육을 하기 위해 통영시 곳곳을 다녔다. 그런데 통영시는 3개의 면이 섬이다. 욕지도, 사량도, 한산도 등 큰 섬들이 있어서 행정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 배가 이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 접안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배를 타고 섬근처에 가서는 작은 배(도선)으로 갈아타고 섬에 들어갔다. 그렇다 보니 발에 물이 젖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교육하러 가다가 길에서 나무를 모아 불을 피워 젖은 발을 말리기도 했다. 이렇게 마을들을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마을의 부녀회장들과 친해서 회장이 집에 없어도 부엌을 뒤져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최 원장은 이렇게 섬의 마을들을 다니면서 농촌여성들을 교육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그 후 2000년 농업기술원에 합류하고 나서 최 원장이 기억에 남는 일로는 농촌교육농장을 활성화시킨 일이다. 2007년 농진청 사업으로 교육농장 인가제도가 생겼다. 농촌체험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농가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정책이었다. 최 원장은 이 제도가 농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혼신을 다해 활성화 시켰다. 그 결과 경남은 전국에서 농촌교육농장이 가장 많고 또 수준도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농촌교육농장 농가들이 최 원장을 보면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한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분야이다.

최 원장은 올해 말 퇴직한다. 최 원장은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어서 집중할 생각이다. 최 원장이 꼭 하고 싶은 일로는 곤충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이다. 현재도 곤충 관련 부서가 있지만 이를 확대해서 곤충연구소를 만들어 미래먹거리를 준비하자는 게 최 원장의 복안이다.

최달연 원장은 1961년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에서 태어났다. 1983년 진주농림전문대학 식품가공학과를 졸업한 후 공직에 들어왔으며 2014년 시금치에 대한 연구로 경상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퇴직 후에는 호주에 있는 딸아이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다니는 성당에 봉사를 하고 싶다는 꿈을 피력했다.

다음은 최달연 원장은 인터뷰이다.

▲여성이 농업기술원 원장이 됐다고 화제다.

-그렇다. 경남농업기술원이 생긴 이래 처음이다. 1908년에 농기원이 설립됐으니 112년만이다.

▲경남농업기술원이 그리 오래된 기관인가.

-그렇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기 전인 1908년 진주종묘장으로 설립됐다. 그때 종묘장이 전국에 2곳 있었다고 한다. 이북에 한 곳이 있었고 남한에서는 진주종묘장이 유일했다.

▲남한에 한 곳뿐인 농업 관련 기관이 진주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진주가 농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신선채소라든지, 딸기생산 등에 있어서는 진주가 전국의 대표적인 재배지이다. 당시도 농업분야에서 진주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그럼, 그 112년 동안 여성이 기관의 대표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유가 무엇인가.

-제도적으로도 좀 막혀있었던 부분도 있다. 지금은 다 없어졌다. 그리고 농업분야라는 게 지금까지는 여성들이 도전하기에 좀 생소한 분야이기도 했다.

▲지금은 어떤가.

-경남농업기술원 전체 직원의 약 30%가 여성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여성원장이 임명되는 게 뉴스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럼 최 원장 다음에도 여성원장이 될 만한 사람들이 많은가.

-아쉽게도 바로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원장이 되려면 과장, 국장 등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현재 경남농기원 과장, 국장에 여성이 없다. 그래서 향후 10년 이상 기다려야 다시 여성원장이 탄생할 것 같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최 원장은 어떻게 했나.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어쨌든 경남농기원에서 과장과 국장 등의 경력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남았기에 원장이 될 수 있었다. 제 능력보다는 시대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농업기술원에 들어온 게 언제인가.

-처음에 농업기술원으로 들어온 게 아니다. 1984년에 국가직으로 농촌지도직이라는 공무원 제도가 있었다. 그 시험을 쳐서 합격해 처음에 통영시 농업기술센터로 들어왔다. 그리고 1997년에 경남농업기술원으로 왔다.

▲여성으로서 농촌지도직이라는 게 생소했을 텐데 어떻게 지원하게 됐나.

-제가 진주농림전문대학 식품가공학과를 졸업했다. 이 학과는 졸업하면 식품가공회사 등으로 취직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당시 농지개량조합, 지금의 농어촌공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농기원에서 일종의 인턴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촌지도직이라는 시험이 있다는 것을 게 됐다. 또 대학의 선배들이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버지와 선배들의 권유로 시험을 쳤는데 합격을 해서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농촌지도직이 무엇을 하는 건가.

-농촌의 생활지도, 농촌지도 등의 업무를 하는 것이다. 제가 한 일은 당시 농촌 여성들의 의식개선, 생활환경 개선, 소득사업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그게 뭐하는 일인가.

-주로 농촌여성들을 교육하는 일이다. 당시 “밥만이 주식이 아닙니다. 감자, 고구마를 많이 먹읍시다” 이런 구호 아래 마을단위로 다니면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간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그런 구호를 들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 같다.

-지금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들 거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아직 쌀이 자급이 안 돼 있던 시절이라 그 교육의 중요성이 높았다.

▲야간 교육을 하는 이유는 뭔가.

-낮에는 논밭에 나가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부녀자들도 시간이 없다. 그래서 부득이 야간에 모아놓고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있나.

-통영시는 7개 면으로 구성돼 있는데 3개 면이 섬이다. 욕지도, 사량도, 한산도 등이 모두 면이다. 그런데 이 섬으로 교육갈 때 힘든 일이 많았다. 당시는 섬에 큰 배가 접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배로 가다가 중간에 작은 배(도선)으로 갈아타고 섬에 가야 된다. 작은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발에 물이 젖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에 발에 물이 젖으면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럴 경우 길가에서 나무들을 모아서 불을 피워 젖은 발을 말리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난다. 또 자주 교육을 다니다 보면 마을 부녀회 회장님들과 친해진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잘 아는 회장님들 집에 가서 아무도 없는 부엌을 뒤져서 밥을 먹고는 “회장님, 밥 잘 먹고 갑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학교 선배가 농촌지도직으로 같이 근무해서 늘 함께 다녔다.

▲그 이후에는 어디서 근무했나.

-그 이후에는 삼천포, 진주, 창원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도에 지금의 농업기술원으로 왔다.

▲농업기술원으로 온 후에는 여기서 계속 있었던 건가.

-그렇다.

▲농업기술원에서 한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제가 2007년도에 자원이용계장으로 있을 때이다. 당시 제 업무가 농촌교육농장 담당이었다. 농진청에서 농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농촌의 체험을 체계화해서 교육농장을 인가하는 그런 제도였다. 그걸 제가 정말 열심히 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육농장으로 인가받은 농가가 전국에서 경남이 제일 많다. 수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경남의 교육농장들이 제일 잘 된다. 교육농장 농가들이 저를 만나면 활성화를 위해 뛰어다녔던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곤 하면서 감사해 한다.

▲경남에 교육농장이 몇 개나 되나.

-작년까지 123개였고 올해 늘어나 134개가 된다.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고 성공적으로 정착됐다는 자부심이 있다.

▲또 자랑할 만한 일이 있나.

-제가 아무래도 여성이다 보니 농촌여성들과 관련된 일이 많다. 농촌여성조직 가운데 가장 잘 된 것이 생활개선회이다. 전국으로 10만 명 정도의 회원이 있는데 경남에 1만 500명이 조직돼 있다. 전국적으로도 생활개선회가 잘 운영되고 있지만 경남생활개선회가 활성화돼 있다. 정말 활동을 열심히들 한다. 그것도 제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개선회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시·군 회장들이 모인 도 연합회가 있는데 여기를 통해서 주로 활동을 한다. 최근에 코로나로 꽃 소비가 잘 안돼서 꽃 소비 촉진행사를 했다. 양파가 잘 안 팔리면 양파 많이 먹기 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생활개선회에서 유익한 활동들을 많이 한다.

▲이제 원장이 됐는데 임기가 얼마나 남았나.

-제가 올 12월에 퇴직이다. 그래서 1년도 남지 않았다.

▲그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원장으로 이것은 꼭 하고 싶다, 이런 게 있나.

-그렇다. 시간이 많지 않다. 1년간 뭘 그리 대단한 일을 하겠나. 그래서 집중해서 성과를 내려고 한다. 저는 곤충이 앞으로 미래먹거리로 굉장히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곤충산업이 자리를 잡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은 농업기술원은 기술개발이나 연구를 하는 기관이니까 곤충연구소를 발족시켜 농가들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다. 제 재임 중에 연구소를 여는 게 제 목표이다.

▲또 어떤 게 있나.

-농업기술원에서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연구관들이다. 금실이라는 딸기 품종을 개발하는 것 등을 이 분들이 한다. 우리 기술원에 77명이 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중간 정도 규모이다. 그래서 연구관을 3명 더 증원하는 게 제 목표이다. 또 농촌지도직도 2명 증원시킬 생각이다.

▲명함을 보니 농학박사로 돼 있다.

-그렇다. 경상대학 원예과에 진학해 2014년에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농업기술원 내에 제가 자주 모이는 모임이 있다. 7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저 빼고는 모두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잘 도와줘서 무사히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연구 분야는 무언가.

-저는 시금치 종자발아에 대한 연구였다.

▲시금치 종자발아가 연구를 할 만한 분야인가.

-그렇다. 일반 채소에 비해 시금치는 종자발아가 잘 안 된다. 그래서 평소에도 관심이 있던 부분이라 그 분야를 공부했다.

▲퇴직 후에는 무얼 할 건가.

-아직 계획이 없다. 그동안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와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는 다니는 성당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 바쁘다는 이유로 늘 대충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퇴직하면 좀 제대로 성당에서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외에는 딸아이가 호주에 사는데 거기에도 좀 왔다 갔다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향은 어디인가.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이다.

▲그래서 산청 원지 일원에 원장 취임 축하 현수막이 많이 걸려있나.

-이재근 산청군수가 산청 사람이 큰일을 했다며 농업 관련 단체들에 얘기를 해서 그리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대담 : 황인태 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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