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9. 조선 초기의 진주지역의 성장과정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9. 조선 초기의 진주지역의 성장과정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2.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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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진주는 1만호가 넘는 전국 6대 큰 고을
양성지(梁誠之)가 임금께 올린 ‘八道地圖’에
“경주와 평양이 으뜸이고, 나주와 남원이 그 다음이며,
전주와 진주가 또 그 다음이다”라고 기록.

세종 때 군호(軍戶)를 배정하는 호수만 1628호, 5906명
동국여지승람에 “진주는 영남 공물의 절반을 담당하고,
여염이 태평하여 음식하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기록
진주성도(19세기)에 표시한 조선 전기 진주목 주내 열네 마을.
진주성도(19세기)에 표시한 조선 전기 진주목 주내 열네 마을.

지난 호에 이어 조선시대 전반에 있어서 진주의 지리적·행정적 성장양상(成長樣相)뿐만 아니라, 특히 이번 호에서는 임진왜란 후에 펴낸 명실공히 진주역사서의 효시(嚆矢)라고 볼 수 있는 ‘진양지(晉陽志)’를 중심으로 진주의 여러 거주지역의 농사 조건과 풍속, 그리고 주민의 거주 상황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진양지’에 따라 당시 진주 주민의 거주 현황을 보면, 우선 양반 선비가 사는 지역, 일반 백성들이 사는 지역, 그리고 비천한 백성들이 사는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때에는 아직 같은 성씨끼리 살던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마다 여러 성씨가 함께 모여 살았으므로, 당시에 존재했던 각 지역의 신분별 거주지도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당시 양반들이 살았던 지역 가운데는 지난날 향, 부곡, 소 이었던 곳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특수행정구역의 주민은 여느 마을의 사람들보다 어렵고 낮은 사회·경제적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거주지로 주목을 받으면서 양반과 선비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지금 진주시 도심에 해당하는 통합 진주시 이전 옛 진주시 중심 지역은 대안, 적지, 장조, 민고, 풍고, 옥봉, 고경, 동산, 궁남, 중안, 현경, 공북, 몽화, 갈남의 열네 마을(리)로 행정상 나누어져 있었다.

‘진양지’를 참고하여 대략의 그 위치를 조선조 말엽에 그린 진주성도에 표시하면 다음 지도와 같다. 지도에 표시된 이들 열네 마을은 모두 주 안에서 가장 땅이 기름지고 인물이 많이 나는 곳으로 도 안에서도 제일 좋은 동네라고들 했다. 과거에는 양반 선비가 여기에 많이 살아서 높은 벼슬아치가 잇달아 나왔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며 풍속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하였다고 했다. 임진왜란 뒤로 몽화리와 갈남리를 하나로 묶어 성내리로 바꾸고, 중안리, 공북리, 현경리도 묶어서 중안리로 바꾸었다. 나머지 여덟 마을도 모두 대안리 하나로 합쳤기 때문에 마침내 주 안은 세 마을(리)로 묶어진 것이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진주는 영남 여러 고을 공물의 절반을 바칠 정도로 부유한 고을이며, 고을이 아름답기로 영남 제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진주의 풍속에 대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여염이 태평하여 연화(煙火 :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매일 때어 피어오르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농부와 잠부(蠶婦 : 누에치는 여자)가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여 영남 지역의 큰 고을로서 안정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진주는 토질에 알맞은 작물로 오곡과 조, 메밀, 감, 배, 석류, 뽕나무, 삼, 목면을 재배했고, 꿀, 황랍(黃蠟), 녹포, 문어, 은구어, 표고버섯, 석이(石耳), 송이버섯, 지초, 작설차, 자리, 죽피방석(竹皮方席), 가는대, 왕대, 칠, 종이, 돼지털, 사슴가죽, 노루가죽, 산달피(山獺皮) 같은 것들을 공물로 지정하였으며, 약재인 천문동(天門冬)과 우모(牛毛), 세모(細毛), 청각(靑角), 미역, 해삼 같은 것이 토산물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금양촌(金陽村)과 강주포(江州浦) 두 곳에 물고기 잡는 어량(魚梁)이 있었고, 곤양현과 이웃하는 소금 굽는 곳(鹽所)이 한 곳 있어 고을 사람이 오가면서 이를 구웠다. 고을 북쪽 목제리(目堤里)와 서쪽 중전리(中全里), 동쪽 월아리(月牙里)에 자기를 굽는 자기소(磁器所)가 있었고, 고을 동쪽 유등곡(柳等谷)과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한 곳씩 질그릇을 굽는 도기소(陶器所)가 있었으나 이들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나온 그릇은 그다지 좋은 것은 없었다고들 한다.

특별히, 세종 때의 자료에 따르면 진주의 호수는 1628호, 인구가 5906명이요, 속현인 반성(班城)의 호수는 277호, 인구가 687명이요, 영선(永善)의 호수는 61호, 인구가 181명 이었다. 군인남자(軍丁)는 시위군(侍軍 )이 174명, 영진군(營鎭軍)이 188명, 선군(船軍)이 975명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 때에 주민의 호수가 일천육백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때의 호수는 자연호 전체의 숫자를 일컫는 것은 아니고 군호(軍戶)를 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성된 호수를 지정하는 것으로 실제의 호수를 알려주는 기록은 아니다. 성종 때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임금에게 올린 글 ‘八道地圖’에서 우리나라 만가지읍(萬家之邑)에 관해 언급하면서, 경주와 평양이 으뜸이고, 나주와 남원이 그 다음이며, 전주와 진주가 또 그 다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 성종 당시에 진주는 호수가 일만 호를 넘어서는, 전국에서 상위 여섯 개의 큰 고을 중의 하나로 꼽혔던 셈이다.

이토록 조선 중기까지의 우리 진주는 명실공히 지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말 그대로 조선 천지에서 가장 큰 고을로서 그 위세를 떨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호에 기술하겠지만, 그토록 위세가 당당했던 우리 진주는 뜻밖에 1500년대 말에 돌발했던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라는 지울 수 없는 통한(痛恨)의 역사적 전상(戰傷)의 쇠잔(衰殘)과 아픔으로, 그토록 지고(至高)하고 막강했던 진주고을의 위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뭇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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