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0.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와 진주의 퇴조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0.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와 진주의 퇴조 -상-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3.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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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도末 두차례 대규모 전투로 진주발전 답보

임진(1592)·계사(1593) 두차례 왜군과 피비린내나는 전투
제1차 전투는 김시민 장군 지휘로 왜의 대군 물리쳤으나
제2차 전투에서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수만명 처참히 학살

진주성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던 까닭은
진주가 그만큼 조선과 왜 서로에게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
제1차 진주성전투 상황도. (이현석 ‘임진전란도’에서 옮김)
제1차 진주성전투 상황도. (이현석 ‘임진전란도’에서 옮김)

기원전 삼한시대(B.C 200년 즈음)에 고순시국(古淳是國)으로 시작된 진주는 고녕가야(古寧伽耶)라는 이름으로 가야시대를 거친 후, 삼국시대의 백제 지배하의 거열성(居列城)으로 발전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서 명실공히 진주는 거열주(居列州), 청주(菁州), 강주(康州)로 이어지면서 진주는 장구한 그 역사만큼 행정적으로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거대한 큰 마을로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그 후 진주는 고려조 초기(940년 즈음)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오늘날의 진주(晉州)라는 공식적인 지명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고려 성종 때(983년)에 이르러 드디어 진주목(晉州牧)이라는 당시로써는 전국적 규모의 큰 지역부락으로 지정되면서, 그 후 조선초기에 이어 조선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진주는 그 이름 그대로 지속적인 발전을 지속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 성종 당시에 진주는 호수가 1만호를 넘는 전국에서 여섯 번째 큰 고을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1500년도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곳 진주는 주변의 외교적 정세에 따라 그 발전의 기세가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진주 남강변에 자리잡은 촉석루 일대에 정비된 진주성은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 두 해에 걸쳐 왜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던 격전의 현장이다. 두 해의 진주성 전투 가운데 임진년 10월 제1차 전투는 소수의 병력으로 왜의 대군을 물리쳐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기념되며, 계사년 6월의 제2차 전투는 진주성의 함락과 함께 수만의 인명이 처참히 학살되어 엄청난 참극을 빚었던 전투로서 우리 역사 속에 새겨지고 있다.

진주는 당시 경상우도의 거진(巨鎭 : 병마절제사 또는 병마첨절제사가 있는 큰 군진)인데다가 전란 중에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가는 요충지였다. 진주를 지켜내지 못하면 전라도가 곧장 왜적에게 짓밟힐 뿐만 아니라 멀리 북녘 의주에 머물며 전라도와 서해안을 통하여 명령 체계를 유지해오던 국왕과 정부와의 연락이 끊어지게 했다. 당시는 남해 해상, 서부 경남, 전라도 금산 방면의 어느 한 곳만 방어선이 무너져도 국가 회복의 기틀을 잃어버릴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임진, 계사 양년에 걸쳐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진주성에서 이루어졌던 까닭은 진주성이 그만큼 서로에게 전략상 중요했기 때문이다.

왜란 초기만 하더라도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의 서쪽 내륙 지방은 왜군의 북상로에서 빗겨나 있어 직접적인 공격은 받지 않았으나 전선이 확대되면서 진주도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왜군이 대대적인 공격 채비를 하기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다섯달이 너머 지난 9월 말경에 이르러서였다.

김시민 장군을 선무2등 공신으로 추록한 내용의 교서.
김시민 장군을 선무2등 공신으로 추록한 내용의 교서.

선조 25년 9월 24일 김해, 부산 동래 등지에서 합세한 2만~3만여 왜군이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진군하여, 10월 1일 함안과 진주의 경계에 해당하는 부다현을 넘었다. 다음날 10월 2일에는 진주성 동쪽의 소촌역(현재 문산)까지 진출하였고, 10월 5일에는 진주성 동쪽 15리쯤에 있는 임연대 등지로 진군하여 진주성에 접근하였다.

10월 6일 아침부터 왜적은 대탄 쪽에서 세 개 부대로 나누어 산야를 뒤덮으면서 진주성으로 진격하였다. 한 부대는 진주성 동문 밖 순천 당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굽어 내려 보았다. 또 한 부대는 개경원에서 동문 밖을 지나 비봉루 앞까지 열을 지어 진을 쳤다. 이렇게 하여 왜군은 진주성의 남쪽 남강변과 서쪽을 제외한 동북방을 완전히 포위하여 공격 채비를 갖추었다.

2만~3만여 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던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군사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가 3700여 명,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가 100여 명으로 모두 380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노약자를 포함하여 수만 명의 민간인이 성안에 남아 있어 이들도 전투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중위장으로서 이광악과 협력하여 군사를 지휘하였고, 진주판관 성수경(成守璟)은 성을 지키는 급소이자 적의 공세가 예상되는 동문을, 전만호 최덕량(崔德良)은 수성대장으로서 영장 이눌(李訥)과 함께 구북문을, 율포권관 이찬종(李纘宗)은 남문을 나누어 맡아서 방어에 임하였다. 한편 전투가 벌어질 당시 진주성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각지에서 원군이 모여들어 힘을 보태며 호응하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10월 7일부터 시작하여 10일까지 나흘 동안 이어졌다. 진주성은 왜적의 물샐틈없는 포위망 안에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마주해 있었지만, 목사 김시민이 온갖 전략을 구사하여 밤낮으로 진주성을 지켜내는 데에 안간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성안을 돌면서 모든 사정을 몸소 보살피고 아래 장병들을 열의에 넘친 설득으로 격려하고 감격시켜 사기를 북돋웠다. 이렇게 군·관·민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 승리를 이끌어냈다.

진주성 공격에 실패한 왜군은 호남으로 진출할 계획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본국에 허위 보고를 하여 책임을 면하기에 급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력을 잃어버렸고 보급선이 끊겼으며 명나라 군대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작전에 엄청난 차질을 빚었다. 마침내 모든 병력이 남하하게 되었으며 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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