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0.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와 진주의 퇴조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0.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와 진주의 퇴조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3.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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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2차 진주성전투 이후 진주 일대는 초토화
가등청정 등이 이끄는 왜군의 규모는 무려 10만 대군
진주성 군사 2400명과 인근 관군·의병 3000~4000여명
6월 21일부터 아흐레 동안 이어진 전투 결국 ‘중과부적’
1만호가 넘어 전국 여섯 번째 큰 고을이 급격히 쇠락
성곽 무너진 진주성도 전략적 중요성 잃고 한동안 방치
민관군 7만명이 희생된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상황도.
민관군 7만명이 희생된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상황도.

지난 호에서 기술했듯이, 1592년 진주성 공격에 실패한 왜군의 당시 어려운 상황을 계속 기술하면, 이듬해인 선조 26년 1593년 1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며 수복에 성공하면서 왜적은 서울로 물러나게 되었다. 서울로 물러난 왜적은 명나라와의 강화를 교섭하여 4월 18일을 기해 서울을 내어주고 부산을 향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왜적은 남하와 함께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6월 15일 거의 10만에 육박하는 왜적이 김해, 창원으로부터 대거 진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은 6월 16일 함안에 들어와 분탕(焚蕩)질을 하고, 6월 18일에는 의령을 공격하였으며 6월 20일에 이르러 정진(鼎津)을 넘어 의령 읍내를 짓밟았다. 6월 21일 왜적은 진주의 동쪽 방면으로 들어가는 한편 외부 군사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서 단성, 삼가 및 남강 건너편 일대에 진출하여 진주 주변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이때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동원된 왜군은 가등청정(加籐淸正)이 지휘하는 제1대가 2만5600명,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제2대가 2만6000명,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의 제3대가 1만8800 명, 모리수원(毛利秀元)의 제4대와 소조천융경(所早川隆慶)의 제5대가 2만2300명, 길천광가(吉川廣家)의 제6대가 1000명으로 모두 10만 명에 가까웠다. 제1대는 성의 북쪽을, 제2대는 성의 서쪽을, 제3대는 성의 동쪽을, 예비부대인 제4, 제5대는 일부가 성의 북쪽을, 제6대는 남강 오른 편을 맡았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는 아군의 군사는 진주목사 서례원(徐禮元)이 거느린 본주 군사가 대략 2400명이었고, 이밖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와 충청병사 황진(黃進)등이 끌어 모은 관군과 의병의 수가 대략 3000~4000여명이었다.

전투는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아흐레 동안 이어졌다. 본격적인 왜적의 공격이 개시된 6월 21일부터 6월 27일까지 조선의 관군과 의병, 주민들은 합세하여 왜적을 상대로 치열하게 대항하여 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관은 편대를 나누어 군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고, 주민들은 성안의 흙담을 높이는 일과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돌을 나르는 일을 맡았으며, 의병들은 성을 넘으려는 왜군들을 직접 상대하여 무찔렀다.

진주성의 공격이 어려워지자 적군은 성을 무너뜨리고자 성벽의 밑바닥을 파기 시작하였고, 6월 28일에는 안타깝게도 큰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성안의 관, 군, 민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끝까지 지키려 하였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을 비롯한 군사들은 왜군이 성안에 들어오자 백병전(白兵戰)을 벌렸고, 주민들도 함께 시가전을 펼쳤으나 이튿날 결국 성이 왜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진주성이 떨어지던 마지막 날에는 지휘부 모든 장수와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왜적은 성안에 남은 군, 관, 민 6만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왜적도 적지 않게 전사하였으나 아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이종인, 김준민, 이잠 같은 분들은 성안에 남아있던 남녀 주민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고,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같은 분들은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때 의기 논개도 촉석루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함락하고 광기어린 살육을 자행한 왜적은 곧바로 남으로 곤양, 하동, 악양 방면과 북으로 삼가, 단성, 산음 방면으로 향하여 사방을 살육하고 약탈하였다. 그러나 왜적은 구례, 곡성까지 나아가서 남원을 엿보다가 진주로 돌아왔고, 다시 7월 17일 즈음에는 진주를 떠나 창원, 부산 쪽으로 철수하였다.

조선 조정은 7월 20일 신임 진주목사를 임명하고, 26일에는 국왕이 관리를 파견하여 성이 함락된 전말과 부근 적세를 탐지하도록 하는 한편,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6일자로 선전관 유대기(兪大祺)가 진주성 함락의 전말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8월 9일 즈음 경상우감사 김륵(金玏)이 모든 고을의 승군을 동원하여 전사자의 뼈를 묻었고, 9월 5일에는 조정에서 보낸 예조낭관(禮曹郎官)이 목숨 바친 이들을 제사지냈다. 이보다 앞서 8월 7일에는 비변사(備邊司)의 건의에 따라 김천일, 황진, 최경회, 이종인, 김준민, 장윤(張潤) 같은 여섯 사람에 대해 공적을 표창하고 벼슬을 높이는 조치가 우선 이루어졌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결과로 경상우도는 장수가 흩어지고 인심이 흉흉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조선조 성종 때까지 1만호가 넘은 전국 여섯 번째의 거대한 큰 고을이, 통한(痛恨)의 임진(壬辰, 1592년), 계사(癸巳, 1593년)의 두 해를 거치면서 당시 조선왕의 무능과 이웃 왜적의 제국주의적 기습침탈로, 지금까지 초록의 평화로만 살아온 우리 진주의 하늘과 땅은 세계 전사(戰史)상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가장 처참(悽慘)한 초토(焦土 scorched earth)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곳 진주에서 천세만세(千歲萬歲)를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살았던 진주 사람은 물론, 짐승도, 벌레까지도 일루(一縷)의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진, 말 그대로 귀곡(鬼谷)의 깜깜한 전설의 폐허가 되고 말았으니 전쟁 전에 진주를 포함한 경상우도의 그 위세와 규모는 급기야 이전 한 도(道)로서의 모양조차 갖출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성곽이 무너진 진주성은 이후 그 전략적 중요성이 크게 감소되어 한동안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상태에 이르렀다. 왜적도 진주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상의 손실을 입어 호남 점령의 목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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