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1.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진주(晉州)(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1.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진주(晉州)(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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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2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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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敬義思想 조선 후기 진주지역 발전의 초석

남명의 ‘치용’ 내지 ‘실천’ 중심 현실세계 지향 사상은
임란으로 몰락한 진주지역 재기의 정신적 용기와 희망
남명 사후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경상우도 남명학파는
광해군때 전성기를 누리다 인조반정 후 완전히 퇴조
안동권 퇴계학파에 뒤지지 않던 진주권 남명학파가
이후 정계진출은 끊기고 학문의 흐름도 급격히 사라져

산청군 시천면 남명 조식 선생 기리기 위해 지어진 덕천서원.
산청군 시천면 남명 조식 선생 기리기 위해 지어진 덕천서원.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남명의 과격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한때 남명학파를 반대하는 세력들로부터 그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뿌리가 실천과 현실을 전제로 하는 경의지학(敬義之學)으로 통칭되는 바, 만년에 자신의 학문을 요약하여 말하길 “경의(敬義)라는 이 두 글자가 우리 집에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만고를 통해도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성현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결과적으로는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결국 남명의 의(義)는 문인들에게 이어져 임진왜란 때 수많은 의병장을 나오게 하였거니와, 각재 하항(覺齋 河沆), 송정 하수일(松亭 河受一),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 남명 학문의 특징으로서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남명의 학문은 항상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치용(致用)과 실천(實踐)을 우선으로 여기고, 강론하고 변석(辨釋)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명이 이처럼 누구에게든지 강조했던 ‘치용’ 내지 ‘실천’에 관한 언급은, 문인들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학문이 학자의 할 일이라고 한 진술과 아울러 생각해 보면 남명의 현실세계 지향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하여 이러한 그의 학문적 사상이 1590년대 진주의 몰락과 재기불능(再起不能)의 벼랑에서, 진주의 새로운 전개라는 정신적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요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상우도를 터전으로 삼은 남명학파는 남명이 돌아가신 뒤로 벌어지는 동-서 분당, 남-북 분당 및 대-소북 분당에 각각 하나의 세력 집단으로 참여하면서 당시 정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때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최영경과 류종지 같은 분들이 연루되어 죽으면서 남명학파의 선비들이 위축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같은 진주 중심의 경상우도 선비들의 눈부신 의병 활동으로 입지가 강화되어 선조 말년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그들은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특히 광해군대에는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정권이 맹위(猛威)를 떨치게 되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인해 영남세가 퇴조하고 기호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되고, 특히 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이 형성되면서 정인홍 세력의 근거지인 경상우도는 조선조 말엽에 이르기까지 배척과 견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타격을 받은 뒤로 선비들이 많이 남인으로 넘어가던 진주지역에서는 ‘남명집’ 판각에 남아있는 정인홍의 글을 도려내는 사건(효종 2년에 있었던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특정한 사람을 대북 잔당으로 지목하여 무고한 사건(현종 6년에 있었던 최백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대북 잔당으로 몰려 징벌을 받는 따위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곤경에 처한 가문이 노론 세력의 도움으로 노론으로 바뀌기도 했다.

더욱이 1728년(영조 4년) 노론 정권을 뒤엎기 위해 일어난 무신란에 안음(安陰, 오늘날의 함양 안의)에 세력 기반을 둔 정희량(鄭希亮)을 비롯한 경상우도의 사림 일부가 관계됨으로써 또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부터 경상우도 사림의 전통은 그 근원인 남명의 학문에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정인홍과 같은 인물이 나오고 무신란도 일으켰다고 보는 시각이 제시되었다. 한편 집권 세력인 노론이 영남 지역에 노론 세력을 부식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게 되면서, 응집력이 약화되고 침체되어 가던 경상우도 사림 가운데는 서인, 노론화해 가는 가문들이 서서히 늘어나게 되었다.

무신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상우도 지역은 노론 세력이 있긴 하였으나 남인 세력에 비교할 정도가 못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 뒤로 이 지역 남인들이 집권층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면서 노론 세력이 차츰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진주지역 안에 사림이 남인과 노론으로 분화하면서 가문 사이에 나타나는 당파의 대립은 경종 때에 진주지역 남인이 연합하여 진주의 노론 세력을 탄압한 사건과 영조 즉위 뒤 노론 세력의 보복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영조 후반기에는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에서 배향 인물의 출향 문제를 놓고 남인 가문과 노론 가문이 극렬하게 대립하여 십여 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던 데서 잘 드러난다.

남명학파가 떨치던 때에는 “그의 문하에는 쓸 만한 인물이 많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남명 문하의 응집력이나 출중한 인물이 퇴계학파에 뒤지지 않아 진주권은 안동권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는 유학의 고장으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로 북인 세력이 밀려나자 진주지역 인물의 정계 진출은 거의 끊어지고 남명에 연고를 두려는 학문의 흐름도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주는 사승관계(스승과 제자 사이)와 당쟁으로 해서 제각기 색깔을 지닌 진주지역의 여러 문중은 관직으로 진출하기 어렵게 됨에 따라 점차 동족끼리 결집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진주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문중의 현조(뛰어난 선조)를 중심으로 한 동성 씨족 사이에 결집력이 강했던 것으로 나타나며, 이는 조선조 후기 이래 진주지역이 갖는 한 특징으로서, 이러한 진주지역의 특징은 진주지역의 향후 발전에 확고한 초석이 되었으며, 그 초석의 뿌리가 남명의 실천 유학인 ‘경의사상(敬義思想)’임이 공인되고 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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