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18화. 한명회와 수양대군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18화. 한명회와 수양대군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4.0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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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계유정난의 피바람이 결국 수양(세조)과 한명회의 목도 옥좨

단종을 죽인 세조, 형수(단종 모, 현덕왕후) 꿈에 시달려
단종복위 관련지어 폐서인하고 무덤 파헤치는 패륜 저질러
세조의 장남 20세 요절, 차남(예종) 왕위계승 1년만에 죽어


예종의 장남도 3세에 죽는 등 손자들도 줄줄이 단명 ‘비운’
한명회는 73살까지 장수하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의 굴욕

딸 4명 대부분 스물살도 못넘기고 요절해 자식이 업보받아

 

한국전쟁 시기 부산국악원 창고화재로 소실된 줄만 알았던 세조 어진의 초본. 1792에 그려진 세조 어진을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인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님께서 1935년에 다시 옮겨 그린 어진이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국악원 창고화재로 소실된 줄만 알았던 세조 어진의 초본. 1792에 그려진 세조 어진을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인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님께서 1935년에 다시 옮겨 그린 어진이다.

1. 수양대군과 그의 자녀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르게 되지만 정통성이 없는 그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위 14년 동안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끊임없이 죽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옥좌 뒤에 숨겨진 그의 삶은 불행하기 그지없었다. 노년에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것으로 숨을 거두었다. 가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긁어 덧난 피부는 늘 고름이 흘러 방안엔 악취로 가득 찰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힌 건 세자의 죽음이었다. 장남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였는데 그 무렵에는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특히 형수(문종 비 현덕왕후)가 꿈에 자주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서 비롯한 악몽이었다.

수양대군은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단종복위 사건과 관련지어 현덕왕후를 폐위시켜 신분을 서인으로 격하해 버렸다. 수양대군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형수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바다에 버리기까지 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차남 해양대군이 예종이 되어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14개월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역시 20살이었다. 장남 의경세자가 죽은 그 나이에 죽었다. 두 아들이 모두 20살에 죽었으니 차남의 요절을 보지 않고 죽은 것이 그나마 세조가 누린 복이었다.

손자들도 단명했다.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이 35세, 차남 자을산군(성종)이 38세,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이 3세에 죽었다.

2. 한명회와 그의 딸

한명회는 일곱 달 만에 태어났다고 하여 칠삭둥이로 불린다. 태중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태어났으니 사지가 온전치 못하여 유모가 솜에 싸서 밀실에 둔 얼마 후에야 완전한 어린애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그 무렵 절친인 권람과 함께 전국 명산으로 유람을 다니기도 하였다.

한명회는 과거와는 인연이 없어 늘 낙방하였고 38세가 되어서야 겨우 경덕궁 궁지기를 하였다. 경덕궁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살았던 집을 말한다. 이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한양 출신 사람들끼리 만든 친목 모임이 있었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궁지기라는 말단직 벼슬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런 한명회가 절친한 벗이었던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계유정난을 주도하였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케 하는데 기여하여 정난공신이 되었다.

압구정도_한명회가 누린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압구정을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이다
압구정도_한명회가 누린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압구정을 겸재 정선이 그린 작품이다

그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확고히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살았다. 그는 노년에 한강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압구정이라 불렀다. 친할 압(狎)자와 갈매기 구(鷗)자를 쓰는데 벼슬을 버리고 강가에 살면서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여 사치스러움이 도를 넘어 결국 여러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갈매기와 친하고 싶었던 압구정. 자연과 풍류를 벗 삼아 신선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였건만 한강에는 갈매기 한 마리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비꼬아 친할 압(狎) 대신에 누를 압(押)자를 써서 압구정(押鷗亭)으로 불렀다.

한명회는 온갖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세조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14년간 피의 정치를 하는 동안 한명회도 그 피의 정치에 직간접으로 개입했다.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그의 업보는 모두 자식들에게 나타났다.

그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첫째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인 윤반과 혼인하였다. 둘째딸은 신숙주의 장남 신주와 혼인하였는데, 신주가 22살 되던 해 아버지 신숙주를 따라 명나라 사행 길에 올랐다가 귀국 중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한명회의 차녀는 청상과부나 다름없이 평생을 혼자 살았다. 셋째딸은 16살 되던 해 11살인 예종과 혼인하였으나 이듬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살에 사망하였다. 인성대군마저 세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때의 장면을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서 오시게, 사돈. 그래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네.”

세조는 한명회를 일으켜 마련된 술상 앞으로 끌었다.

“소신이 전하께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변변치 못한 자식 때문에 성심을 흩뜨린 죄 너무 크나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이보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네. 술이 이 슬픔을 온전히 잊게 해 주겠느냐마는 그래도 한잔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걸세.”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p184에서 따옴

넷째딸은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19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자을산군이 임금이 된 후에 공혜왕후로 추존되었다.

부모의 업보를 자식이 물려받은 점은 세조나 한명회나 공통적이다. 그들의 자식들 대부분은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고통을 그들은 평생 동안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한명회는 73살까지 장수하였으나 죽음 후에는 더욱 비참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에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하여 죄를 물어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무덤 속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형벌)를 당했다. 그의 목은 잘려 한양 저자거리에 매달리는 형벌도 추가되었다.

3. 정보(鄭保)와 얽힌 이야기

정보는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의 손자이다. 그의 서누이가 한명회의 측실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정보에게 매제가 되는 셈이었다.

훗날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 등 많은 충신들이 죽음에 직면하게 되자 정보는 한명회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천추의 악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일로 정보는 한명회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나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세조가 유배형으로 감형시켜 죽음을 겨우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 다음 이야기는 <수양대군과 신숙주>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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