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2. 저항 도시로써 진주의 새로운 전개과정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2. 저항 도시로써 진주의 새로운 전개과정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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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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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례 왜란으로 피폐해진 진주에서 저항정신 태동
남명 실천유학까지 가세 모든 불의와 부정에 저항
주체(主體)·인권(人權)·호의(好義) 독특한 지역정신 형성

세도정치·수취(收取)체제 문란이 극에 달하자
단성 농민봉기가 전국적 농민봉기의 최초 도화선

수곡·덕산서 세력 형성한 농민들 진주로 향해
진주목과 비리관리들의 가옥 파괴하고 통환 철폐 등 요구
진주 농민봉기는 1862년 당시 한 해 동안 전국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진주 농민봉기는 1862년 당시 한 해 동안 전국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15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진주는 말 그대로 천혜(天惠)의 은덕으로 산자수려(山紫秀麗)하고 풍요(豐饒)롭기 그지없는 쾌적한 삶터로써 명실공히 조선팔도의 명승지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명분 없는 왜적의 침탈로 천고미래(千古未來)의 약속된 낙원(樂園)의 땅이 일순간 재기불능의 죽음 같은 황무지로 추락하면서 급기야 진주는 매우 강인(强靭)한 저항의 고을로 급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영남학맥(嶺南學脈)의 거두인 남명(南冥) 실천유학(實踐儒學) 사상의 영향으로 진주와 진주인은 주체(主體)·인권(人權)·호의(好義)라는 독특한 지역정신을 형성하면서 최초의 민란(民亂)과 의병투쟁(義兵鬪爭)이라는 모든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에 강력히 저항하는 충절(忠節)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 조선왕조는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치와 수취(收取)체제의 문란으로 나라 전체가 파탄에 이르렀고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이어지면서 봉건사회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862년의 전국에 걸쳐 발생한 농민봉기(農民蜂起)는 그해 2월 진주(단성)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최초 도화선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진주의 농민항쟁은 다른 지역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항쟁의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항쟁의 성격이 격렬했다.

진주 농민봉기는 직접으로는 환곡(還穀 : 관청에서 백성에게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되돌려 갚게 하는 곡식)의 폐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당시 환곡의 폐단은 전국적으로 극심했지만, 진주에는 경상우병영과 진주목이 있어서 환곡의 부담이 특히 무거웠다. 1862년 당시 경상우병영의 환곡은 삼만 구천여 섬 가운데 이만 사천여 섬을 잃어버렸고, 진주목의 환곡은 사만여 섬 가운데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환곡을 잃어버리는 것은 거의 수령과 향리들이 가로채기 때문이었으나, 당시 수령은 이를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진주목에서는 1855년 이후로 한동안 잃어버린 환곡을 토지에 따라 백성에게 나누어 거두었다가 농민들이 이를 못하도록 해줄 것을 비변사(備邊司 : 조선시대 군사와 관련된 중요 업무를 의논해 결정하던 회의 기구체)에 호소하여 중지한 적이 있었다.

홍병원(洪秉元)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면서 1861년 겨울에 잃어버린 환곡을 조사하여 가로챈 장본인인 서리들을 처벌하는 한편 다시 전에 하던 방식대로 모자라는 만큼을 농민들에게 거두어 채우려 했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십여 만 냥을 토지에 부과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향회(鄕會)에서 승인토록 하였다.

이처럼 관청의 재정이나 세금이 모자라면 이를 토지에 부과하여 거두어들여 채우는 것을 ‘도결(都結)’이라고 했다. 진주목에서는 이와 같은 도결을 모든 면(面)에서 훈장을 불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한편 진주목에서 하는 환곡 해결 방식을 지켜본 경상우병영에서도 이듬해 1862년 1월 역시 수십 명의 향원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육만여 냥을 통별로 부과할 것을 승인케 했다. 이렇게 통을 단위로 부과하여 거둬들이는 것을 ‘통환(統還)’이라고 한다.

환곡을 비롯한 각종 조세의 부당한 징수에 고통을 당하고 있던 진주 농민들은 도결과 통환이 동시에 부과되자 드디어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1861년 12월 도결이 강요되자 우선 진주 농민들은 진주목과 경상감영에 이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다시 통환이 강요되자 농민들은 마침내 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1월29일 진주 축곡면에 살던 유계춘(柳繼春)은 도결과 통환의 철폐를 위해 2월6일에 수곡 장터에서 집회를 개최할 것을 알리는 통문을 돌리고 이튿날부터 사노(私奴 : 집에서 부리는 남자 종) 검동의 집에서 수곡 집회를 준비하였다. 이때 전에 교리(校吏 : 집현전, 홍문관, 승문원, 교서관 등등에 두었던 5품의 관직)를 지낸 이명윤(李命允)도 참여하여 논의하였는데, 유계춘은 수곡 집회와 농민항쟁의 방향을 과격한 방식으로 추진할 것을 결행하였다. 2월2일에는 철시를 요구하는 한글 통문을 진주 읍내 장터에 계시하고 한글 가사체로 지은 초군회문(樵軍迴文 : 나뭇꾼이 돌려 읽는 글)을 작성하여 나뭇꾼의 동참을 호소했다.

마침내 2월6일 수곡 장터에서 집회가 개최되었다. 30여명의 대표가 참가한 집회에서 경상감영에 도결과 통환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튿날인 2월7일 경상감영에 호소할 의송(議送 : 관찰사에게 올리는 청원서나 진정서)의 대표로서 강화영을 선출하고, 장진기와 조확립이 경상감영에 의송을 제출하였다. 이날 유계춘은 수곡 집회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유계춘이 체포된 며칠 뒤 마동과 원당 마을의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수곡 장터를 습격하여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한편 백곡과 금만의 농민들이 삼장과 시천을 공격하고 농민들을 회유하여 규합한 다음, 이들 농민들이 연합하여 마침내 덕산 장터를 장악하였다.

덕산에서 세력을 확대한 농민들은 덕천강을 따라 진주를 향하여 행진하였고, 행진하는 과정에서 도중에 만나는 부잣집 수십 호를 부수었다. 2월18일 아침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몽둥이를 든 진주 각지의 농민 수천 명이 진주읍과 진주성 서쪽5리 지점에 포진하여 진주목의 도결과 경상우병영의 통환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진주목사 홍병원은 농민들에게 신망이 높았던 이명윤을 불러서 농민들이 요구하는 대로 도결를 혁파한다는 전령과 완문을 제시하며 농민들을 설득해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진주읍으로 진출하여 진주목과 병영의 이방을 비롯하여 비리를 저지른 아전들의 가옥을 파괴하면서 세력을 과시하는 한편 병영의 통환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진주 농민항쟁의 진행 과정은 다음 호에 계속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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