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19화. 수양대군과 신숙주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19화. 수양대군과 신숙주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4.0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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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7개 국어를 구사하며 22살에 관직에 나아간 타고난 천재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참여 세종의 총애·사육신과도 친분
안평대군에게 몽유도원도 찬시를 바칠 정도로 가까웠으나

계유정난과 이어진 정국에서 수양대군에 편에 서서 맹활약
안평과 금성대군, 그리고 단종까지 죽여야한다고 목청높이고
폐위된 단종비를 자기 집 종으로 달라고 세조에게 요구하기도

세종과 문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신숙주. 계유정난 때 자기를 사랑해 주던 모든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의 편에 서 변절자로 불린다. 사진은 SBS 드라마의 한 장면.
세종과 문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신숙주. 계유정난 때 자기를 사랑해 주던 모든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의 편에 서 변절자로 불린다. 사진은 SBS 드라마의 한 장면.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세종 시절에는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중국을 13차례나 다녀오는 등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자기를 사랑해 주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에게 붙었으니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할 수밖에 없었다.

변절은 그렇다 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신숙주의 인간성을 잘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정난 직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조완규(안평대군의 수하)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 요문(要文)을 신숙주에게 하사품으로 주었는데 치욕을 견디지 못한 소사와 요문이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해 버렸다. 뒤에 단종복위사건과 관련하여 공신들에게 노비를 내리는 잔치를 또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신숙주가 폐위된 단종비 정순왕후를 자기 집 종으로 달라고 세조에게 요구하였다. 조선 중후기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이나 윤근수의 <월정만필> 그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이 내용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마냥 헛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학문적 역량이 높기로 알려진 신숙주가 그를 키워주고 아껴준 임금으로부터 충절을 꺾고 변절자로 돌아선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때 조선국 왕비였던 정순왕후를 종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배짱은 어떻게 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1. 천재적 재능

신숙주는 그의 나이 21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22살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의 천재적 재능을 꽃피우게 된 것은 집현전에 몸담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책을 읽기 위해서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대신해 주면서 밤을 새워가며 독서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마침 세종이 이를 보고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함께 관에 넣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얼마나 독서광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 7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언어 분야에서도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음운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요동을 13번이나 다녀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음운서인 <동국정운>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 통신사 서장관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귀국하면서 대마도에 들려 무역협정도 체결(계해조약)하였으니 이때의 경험이 훗날 <해동제국기> 저술의 토대가 되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전기 한일교류사와 일본의 역사지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일본에서도 여러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의 능력은 세조가 집권하면서 꽃을 피웠다. 세조가 말하길 당 태종에게 위징이 있다면 나에겐 숙주가 있다고 할 만큼 세조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46세에 영의정에 올라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되었다.

2. 변절의 아이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살았던 사람들의 가치관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외침과 피폐한 정치는 백성들의 삶을 도탄으로 몰아넣었으니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은 어느 때보다 강할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에 대한 충정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선비들은 이성계와 타협하지 않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가 두문동이다. 두문동은 조선 건국에 타협하지 않는 자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함께 무리지어 살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가문마다 조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두문동과 연관 지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현인들이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그곳에서 모두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도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신숙주의 가문인 고령 신씨 집안에도 이에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숙주의 할아버지 신포시(申包翅)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포시는 대부분의 두문동 충신과는 달리 조선 초에 관직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종 때엔 공조참의(정3품)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건 신포시가 두문동의 충절을 버리고 변절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약 신포시가 두문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변절이라는 말은 결코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신숙주의 변절은 물려받은 DNA 영향일지도 모를 일이다.

3. 안평대군을 버리고 수양대군과 손을 잡다

신숙주는 23세 때 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영재성으로 7개 국어를 구사했던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참여하였다. 집현전 시절에는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뒷날 단종복위운동의 주역인 사육신과의 교분도 두터이 쌓았다. 특히 안평대군은 그가 10년 동안 수집한 작품 222점 모두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신숙주에게 부탁할 정도로 그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는데 신숙주가 그 그림을 보고 찬시를 써서 안평대군에게 바쳤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랬던 신숙주가 이들을 버리고 수양대군과 손을 잡은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고명 사은사를 명나라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에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갈 것을 자청하였다. 이때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지명하였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의 동행. 사실 이는 한명회와 권람이 신숙주를 수양대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신의 한 수였다.

사은사로 함께 동행하여 다녀온 이후부터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결국 그들의 밀월은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집현전 장서각에 파묻혀서 밤새도록 독서하며 학문과 수양에 여념이 없던 그야말로 학자였던 신숙주가 정치적 인물로 변신하게 된 순간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집현전 학자들과 등을 돌려야만 했고, 안평대군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해야만 했다. 단종을 죽이고 금성대군을 죽여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가장 크게 높였던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변절의 대가로 얻은 부귀영화는 그의 자식들에 이르러 그 업보가 미쳤다.

4. 인과응보

신숙주는 부인 윤씨와의 사이에서 8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신주(申澍)는 한명회의 큰사위이다. 한명회가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냈으니 신주는 예종과 성종에게 동서가 되는 셈이다. 그는 아버지 신숙주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효심이 지극했던 신주는 급히 귀국하였는데 마음이 몹시 상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22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차남 신면(申㴐)은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 때 반군에게 잡혀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신면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던 당시 함길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시애의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신면은 화살이 다할 때까지 활을 쏘며 분전하다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 <송와잡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갑작스런 변란에 대처할 틈이 없었던 그는 대청 다락에 급히 숨게 되었다. 반군이 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려는데 아전이 그가 숨은 곳을 가르쳐 주고 말았다. 신면은 결국 이시애 앞으로 끌려가 반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신용개가 훗날 그 아전을 찾아 복수한 사실이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신면의 죽음은 후자의 기록이 사실인 듯하다.

신숙주의 아들 중 4남인 신정(申瀞)의 행적은 가장 눈길을 끈다. 그는 성종의 옥새를 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한 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다. 이덕형(李德泂)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령현(高靈縣)에 있는 어느 절에 소속된 노비 부자(父子)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비는 도(道)에서 제일 부자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그가 이 소문을 듣고 그들 부자와 재산을 차지하고 싶었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자, 어보(御寶)를 위조해서 공문(公文)을 만들어 재산을 가로챘다. 이 일이 탄로나 그는 옥에 갇혔다. 성종은 그의 아버지 신숙주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를 살려주고자 하였으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숨기려 하니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신정은 탐욕스럽기가 끝이 없어서 시정의 무리들과 어울려 장사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온갖 방법으로 이(利)만 꾀하니, 그 아비 신숙주가 이를 미워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을 패망(敗亡)시킬 자는 반드시 이 자식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는 < 경혜공주의 깨어진 꿈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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