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2. 저항 도시로써 진주의 새로운 전개과정 (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2. 저항 도시로써 진주의 새로운 전개과정 (하)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4.0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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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은 봉건왕조 말기 사회변혁운동의 시발점

1862년 2월14일부터 열흘 동안 이어진 진주일대 농민봉기
도결과 통환 철폐 관철, 환곡문란 책임 추궁 등 일부 성과

항쟁기간 일백 스물여섯 집 불타고 일흔여덟 집이 털려
비리관리와 봉기 핵심주모자 세 사람 효수형으로 일단락

농민봉기 열기 5월 들어 전라도 이어 충청도에까지 확산
이후 지속되다가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져
진주 농민봉기는 1862년 당시 한 해 동안 전국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진주 농민봉기는 1862년 당시 한 해 동안 전국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지난 호에서 2월 18일 진주목사 홍병원과 이명윤은 농민들의 요구 사항인 도결(都結)과 통환(統還)을 혁파하겠다고 약속했으나, 2월 19일 아침에 오히려 수만명으로 불어난 농민들은 진주목 객사 앞에서 경상우병영 통환의 철폐와 환곡 문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경상우병사인 백낙신이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회장에 나타났다가 농민들의 기세와 신랄한 규탄에 몰려 회유를 포기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농민들의 요구대로 도결과 통환의 철폐가 관철되었지만 농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환곡문란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농민들은 병사의 수행원들을 붙잡아 몽둥이로 구타하고 병영의 이방 권준범과 병영의 환곡을 횡령한 김희순을 붙잡아 매질한 뒤 불에 태워 죽였으며, 병사 백낙신을 붙잡아 두고 그의 탐학과 서리들의 부정행위를 추궁하면서 밤을 넘겼다.

이어 2월 20일 농민들은 도망간 서리들을 추적하는 한편 목사와 병사에게 이들의 신병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농민들은 도결과 통환의 철폐와 삼정문란의 책임 추궁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여 이날 점심때쯤 목사와 병사를 풀어 주었다. 이날 오후 농민들은 여러 지역에 원한이 맺힌 부자들을 지목하면서 그들의 집을 파괴한 뒤 다시 진주읍에 모일 것을 선언하고 외곽 지역으로 흩어져 나갔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 수곡면 창촌리에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 수곡면 창촌리에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월 23일 해산하기까지 항쟁 농민들이 다니면서 공격하거나 파괴한 집이 스물두 마을에 쉰여섯 집이나 되었고, 재물을 빼앗은 집이 서른여덟 집이었다고 하니 항쟁을 시작한 2월 14일부터 2월 23일까지 농민항쟁 열흘 동안에 걸쳐 부수어지거나 불탄 집이 모두 일백 스물여섯 집이었으며, 돈과 곡식 같은 재산을 빼앗긴 집이 일흔여덟 집이나 되었던 것이다.

진주농민항쟁의 진행 상황은 경상우병사 백낙신(白樂莘)과 경상감사 이돈영(李敦榮)의 장계(狀啓)를 통하여 정부에 보고되었다. 이를 통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정부는 먼저 서리들의 횡령이 농민들의 고통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관에 호소하지 않고 무력 봉기한 농민들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한 수령의 책임을 물어 진주목사 홍병원, 경상우병사 백낙신, 전임 감사 김세균을 파직하고 박규수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봉기의 주동자와 부정을 저지른 서리를 처벌하고 개혁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였다.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3월 18일 안핵사 박규수가 진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우선 농민항쟁에서 가장 원성의 대상이었던 백낙신의 불법적 비행을 공격하는 장계를 올렸다. 박규수의 장계가 중앙에 도착하여 백낙신은 엄형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 홍병원도 곧장 체포하였으나 박규수로부터 아무런 장계가 올라오지 않자 이내 석방하였다.

진상 조사에 신중을 기했던 박규수는 5월 11일이 되어서야 조사 내용을 종합해서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때 올린 장계는 죄인들을 문초한 기록을 정리한 「사계발사(查啟跋辭)」, 진주목의 포흠(관청의 재물을 사사로이 써버림)을 조사한 「사포장계(査逋狀啓)」, 환곡의 해결방안을 담은 「강구방략이정환향적폐소(講求方略釐整還餉積弊疏)」 같은 세 가지인데, 마지막 것은 나중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설치되는 데에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박규수의 보고에 따라 유계춘을 비롯한 세 사람의 핵심 주모자는 5월 30일 진주성 남문 밖 공터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효수형(梟首刑 : 칼로 자른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세워두는 형벌)을 당하였다. 나머지 죄인들도 박규수가 건의한 처벌 내용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항쟁 관련자들이 입에 자주 오르내려 중요한 혐의를 받고 있던 교리 이명윤에 대해서도 박규수가 건의한 바에 따라 의금부에서 체포하여 심문한 다음 전라도 강진 고금도로 유배하였다.

농민항쟁기념식. 권력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진주농민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이 매년 3월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진주농민항쟁기념 광장에서 열린다.
농민항쟁기념식. 권력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진주농민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이 매년 3월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진주농민항쟁기념 광장에서 열린다.

한편 진주에서는 새로 교체된 병사와 목사가 농민항쟁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들은 부임한 다음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동안의 폐단에 대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를 표면상으로는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월 들어 농민봉기가 전라도 각지에 파급되고 심지어 충청도에까지 확산되자 극도의 위기감에 젖은 정부는 강경 진압을 통해 지역적인 확산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농민봉기가 계속되자 정부에서도 점차 강경진압이나 형식적인 선무 작업만으로는 농민봉기를 막기 힘들다고 인식하였다.

결국 이와 같이 진주농민항쟁이 삼남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 전개 확대되면서 당시 봉건정부를 위기에 몰아넣기에 이르렀다.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은 봉건적 지배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계급 사이의 이해관계 갈등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항쟁 초기의 준비과정에서는 저마다 신분 계층의 처지가 달랐지만, 유력 양반이나 몰락 양반이 적극적으로 항쟁을 주도하고 빈농을 핵심으로 한 농민들이 여기에 참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항쟁이 고양되어 전면 봉기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몰락 양반과 빈농층이 전면에 나서면서 계층끼리 처지가 엇갈리는 양상을 보였다. 빈농들은 조세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양반이나 부자들과 함께 손을 잡았으나, 후반에 가서는 경제적 이해가 다르고 봉건 권력과 연결된 이들에 대해 분명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농민들이 겨냥했던 마지막 목표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농민항쟁은 끝나게 되지만, 이러한 항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은 농민층의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은 이후 더욱 거세어진다.

1870∼80년대에 가서도 농민항쟁은 여기저기서 잇달아 벌어지면서 마침내 1894년에 가서는 한 단계 발전한 농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진주농민항쟁은 봉건 왕조 말기에 농민이 이루어내는 사회변혁운동의 한 시발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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