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봉기 한해동안 전국 내란 상황으로 전개
일본군 개입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 체포되면서 막내려
고부 민란 발생 전부터 진주에서도 동학교리 신봉 조직화
백낙도·손웅구·고만준 등 중심 따르는 무리 수천에 이르러
진주에서 동학군 봉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4년 9월
9월8일 진주 73개 면 주민 수천명이 죽창 들고 시장에 집결
지난 호에서 기술했듯이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은 1870∼80년대에 이르러서 조선팔도의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다발(同時多發)적으로 일어난 전국농민운동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으며, 동시에 그 운동은 그때까지는 매우 확고했던 봉건적 지배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맞추어 일어남으로써, 당시의 다양한 계층 사이의 복잡한 갈등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성격의 진주농민항쟁은 마침내 1890년대에 가서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에 힘입어 끝내 한 단계 발전된 농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진주농민항쟁은 봉건왕조 말기에 농민이 이루어낸 사회 변혁운동의 중대한 시발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고부(古阜)에서 민란이 일어난 뒤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는 거의 한 해 동안 전국을 내란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 해 전라도에서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여 정부로부터 폐정개혁(弊政改革)의 약속을 받아내고, 수십 개 고을에 집강소(執綱所 :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에 의한 지방행정과 치안을 유지한 기관)를 설치하여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장악하는 일종의 혁명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이 같은 사태를 침략의 기회로 삼은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동학군의 토벌에 나서자 동학농민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결국 동학군이 일본군·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봉준(全琫準) 같은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부 민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진주에서도 동학 교리를 신봉하는 신도들과 그 조직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찍이 진주지역에서는 백낙도(白樂道)라는 사람이 진주 덕산을 근거지로 가까운 마을과 고을로 동학 조직을 넓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핵심 제자이자 측근으로는 손웅구(孫雄狗)라는 인물과 손웅구 지휘 아래 고만준(高萬俊), 임정룡((林正龍), 임말룡(林末龍) 같은 핵심 인물이 알려지고 있으며, 그들 무리가 수천이나 되었다고 말해지기도 하였다.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군이 본격적으로 봉기한 다음 관군의 토벌에 쫓긴 호남 동학군이 영남지역으로 피해 들어올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자 경상도 감영에서는 모든 고을과 진영에 이들에 대한 수색과 체포를 명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지역에서도 동학도들에 대한 토벌과 체포 활동이 벌어졌다. 4월 13일 관군은 덕산 가까이 대차례(오늘날 내대 마을) 등지에 동학도 오백여 명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삼백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기습하였다. 이때 백낙도는 관군에 체포되어 측근 두 사람과 함께 4월 15일에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梟首)되었다. 백낙도의 처형에 항의하는 수많은 동학도들의 소요가 뒤따르기도 하였으나 이내 진정되면서 동학도들의 위세는 얼마 동안 약해진 듯했다.
이후 진주에서 동학군 봉기의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해 9월부터이다. 이미 9월 이전부터 진주 마동리 등지에서 동학도들이 매일 집회를 열고 강계부사를 지낸 하겸락(河兼洛)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가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동리 집회에서 동학도들은 진주 고을 차원의 대회를 결정하여 이를 알리는 방문(榜文)을 걸었다. 여기에는 이달 9월 8일에 마을마다 열세 사람씩 평거 광탄진에 모두 함께 모일 것, 참여하지 않는 면(面)에 대해서는 마땅한 조치를 할 것, 사흘 먹을 식량을 가지고 올 것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 약속한 8일, 진주 일흔 세 개 면의 주민들이 면마다 일백 명씩 죽창을 들고 일제히 읍내 시장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충경대도소(忠慶大都所)’라는 동학군 본부를 설치하고 모든 마을에 다시 통문을 보내어 동리의 리임(里任), 동장(洞長)들로 하여금 자기 지역의 민폐를 바로잡을 것, 큰 동네에서는 쉰 사람, 보통 동네에서는 서른 사람, 작은 동네에서는 스무 사람씩 9월 11일 오전 복흥 대우치로 모일 것, 여기에 응하지 않는 리임, 동장 집은 탕진할 것, 이렇게 통고를 하였다. 한편 충경대도소에서는 ‘경상우도 모든 고을 읍촌에 사는 대소민들에게’라는 제목의 방문(榜文)을 내걸어 왜적의 침입을 정벌하고자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다는 것과 동학도에 호의적인 지금의 병사가 갈리고 왜와의 조약에 따라 새로운 병사가 부임할 것이니 이를 막을 것, 그리고 사사로이 토색(討索)하는 자는 대도소로 신고할 것을 널리 알렸다. 이렇듯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운동이 경상우도 진주에서 꽤 오랜시간 동학도들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