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3. 진주(晉州)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3. 진주(晉州)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하)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4.2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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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초 진주에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동학농민봉기
9월 중순 진주 읍내와 변두리 마을 동학도들에게 거의 장악

인근 전라, 하동 등 지역에서 동학지도자들이 진주에 집결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과 일전 벌이나 패주

호남으로 이동한 잔여세력들 그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전개
이후 1890년도 말 의병으로 활약 한때 진주성 장악하기도
진주농민항쟁기념탑_동힉농민봉기의 정신적 모태인 진주농민항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림된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 수곡면 창촌리에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_동힉농민봉기의 정신적 모태인 진주농민항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림된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 수곡면 창촌리에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94년 전라도 고부(高阜)에서 발발(勃勃)한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가 같은 해 4월 초부터 거의 10월 말까지 진주 지역에서 맹렬히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9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진주 읍내와 변두리 마을들이 동학도들에게 거의 장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이나 구체적 상황은 분명하지 않다. 단지 9월 14일 진주 대여촌 마을 사람들이 읍폐(邑弊)를 교정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통문(通文)을 모든 면(面)에 보내어서 집회를 열었으며 집회를 마친 다음 장터에 장막을 세우고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사실만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당시 진주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민가를 부수고 불태운다든지 동헌(東軒)에 침입하여 관장(官長)을 핍박하고 죄수들을 마구 석방시키는 등의 행패를 자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명, 또는 수백명씩 무리를 지어 옥천사(玉泉寺: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에 있는 큰 절)로 가서 절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한편 이 무렵 9월 17일에는 다른 지역의 동학도 수천 명이 하동을 거쳐 진주로 들어와 각 관청에 접소(接所)를 설치하였고, 다음날 18일에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金仁培)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왔다. 이들 동학군은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진주의 여러 지역에 포(包: 동학의 집회소) 단위로 배치되었다. 이들 다른 지역의 동학군들이 처음 진주에 도착하자 병사와 목사가 성밖까지 나와 이들을 만나고, 수차례 면담으로 설득하여 마침내 며칠간의 대회를 마친 뒤 물러났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소촌역으로 가서 타격을 가하고, 22일에는 대여촌면의 용심동을 습격하여 이 마을의 서른채 정도의 집들을 불태우고 많은 주민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결국 9월 24일에는 진주성 안에 있던 동학도들이 모두 물러났지만, 남은 무리들이 여러 마을에 계속 출몰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영과 진주 관아의 관속들이 모두 도망하여 병사와 목사가 손을 쓰지 못하였다.

진주 동학농민봉기는 한때 맹렬한 위세를 떨쳤으나 관군과 일본군 연합에 궤멸되어 흩어졌다. 이후 항일의병으로 다시 부활한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진주 동학농민봉기는 한때 맹렬한 위세를 떨쳤으나 관군과 일본군 연합에 궤멸되어 흩어졌다. 이후 항일의병으로 다시 부활한다. 사진은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 한 장면.

한편 조정과 감영에서는 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 소식을 받고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捕使)로 내정하여, 일부 군병을 이끌고 진주, 하동 등지로 가서 일본군과 협동하여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또 9월 25일 부산에서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이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하여 한 부대가 먼저 29일 하동으로 진출했다. 이날 하동 광평동에서 당시에 하동에 남아 있던 동학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동학군은 섬진강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강을 건너 동학군을 추적했으나 종적을 잃어버려 동학군이 버린 무기와 양식만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 후속 부대와 합류한 일본군은 30일에도 섬진강 건너편에 출몰한 동학군을 추저하였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하동으로 철수했다.

그런 뒤 10월 7일에는 제4중대장 영목(鈴木) 대위가 경남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곤양에 도착하면서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에는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여 일본군, 관군과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져 많은 동학군들이 총살되거나 효수되었고, 경남지역 동학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임석준(임석준(林石俊)이 체포되기도 했다.

경남 서부지역 동학군의 주력이 크게 괴멸(壞滅)된 전투는 곤양의 금오산 전투와 진주의 고승산성 전투였다. 일본군은 10월 10일 곤양 안심동 남쪽 금오산에 동학군 사백여 명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고 두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서 많은 동학군을 생포하고 일흔여 명을 사살했다. 그 후 12일 일본군은 진주 백곡리에 동학군이 모여 진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에서 진주 수곡리에 이르렀다. 이때 토포사 지석영이 진주부 동쪽 20리에 있는 송촌과 동쪽 30리에 있는 집현산 아래와 단성 북쪽 10리에 있는 정정, 원본정 등의 여러 지역에 동학군 사오백 명이 모여 모두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려 한다는 급보를 알려와, 일본군은 즉시 길을 돌려 진주부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부대를 나누어 송촌과 집현산 부근에 이르렀으나 동학군은 이미 단성 지방으로 이동해버린 상태였다.

같은 날 단성 지방의 동학군들이 진주를 공격하려고 수곡마을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다음날인 14일 진주 수곡마을에 이르렀다. 수곡마을 산야에 깔려있던 동학군들은 일부는 고승산성으로 물러나 방어 준비를 하고, 나머지 일부는 북쪽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의 공격이 있자 산성의 동학군들은 산꼭대기 낭떠러지에 의지해서 완강히 저항했고, 북쪽으로 물러났던 동학군이 일본군의 오른쪽을 공격해 왔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본군을 궁지에 몰기도 했으나, 무기나 전투 기술 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을 점령했다. 산꼭대기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덕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 한 소대가 이를 추적했으나 미치지 못하여 그냥 돌아왔다. 이날 전투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이 거두어 모은 시신만 일백 여든여섯 구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은 하동에 다시 호남의 동학군이 내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19일 하동으로 진격하였고, 20일, 21일에 걸쳐 섬진강을 건너 응치, 삼봉산, 섬진역에 출몰하는 동학군들에 대한 몇 차례의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이 섬진강 건너편에서 동학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하동 지역의 동학군들은 배후를 치는 작전으로 나왔으나, 이도 곧 격파되어 동학군들은 마침내 흩어지게 되었다.

9월 말경부터 전개된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동학군은 하동 광평동 전투, 곤양 금오산 전투, 진주 고승산성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주력이 괴멸되고 말았다. 이로써 진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학군의 세력은 점차 위축되었으나, 그 잔여 세력들이 호남으로 다시 이동함으로써, 그곳에서 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전개한 결과, 이후 1890년도 말기의 의병으로서 이름을 크게 떨친 노응규(盧應奎)같은 보수 유생 출신의 항일의병대장(抗日義兵隊長)이 나타나서, 1896년에 그가 직접 별동부대 500여명을 거느리고 소위 조선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봉기(抗日義兵蜂起)사건인 을미의병(乙未義兵)에 참여하여, 진주성을 장악하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후 그들의 세력은 1900년 즈음까지 동학운동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는 ‘동학당(東學黨)’, ‘영학당(英學黨)’ 같은 이름으로 끊임없는 의병 투쟁과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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