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2화. 세조의 왕위 찬탈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2화. 세조의 왕위 찬탈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5.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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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조 단종의 왕권강화 막고자 측근들 제거해 권력 장악
단종과 각별했던 혜빈 양씨 등 수양대군에겐 눈엣가시
수양대군.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 숙빈으로 삼아 견제

수양 단종 주위 세력 커지기 전에 역모죄 씌워 제거
단종 수양대군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옥쇄 내줘

단종 주변인들 목숨 부지하는 조건에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수양 왕위 오른 뒤 여론 핑계로 혜빈 양씨 등 18명 죽여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바치던 경회루_ 수양대군은 단종의 주위 사람들 모두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혜빈 양씨와 그의 세 아들,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경혜공주 남편이자 단종의 자형)을 귀양 보내니 단종은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바치던 경회루_ 수양대군은 단종의 주위 사람들 모두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혜빈 양씨와 그의 세 아들,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경혜공주 남편이자 단종의 자형)을 귀양 보내니 단종은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1. 단종의 주위 사람들을 제거하다

수양대군에게 가장 거추장스런 존재는 혜빈 양씨였다. 그녀는 본래 궁녀였다. 세자(문종)의 병 수발을 하던 중에 세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된 인물이다. 단종이 태어날 무렵 그녀는 막내아들 영풍군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손자 단종을 위해 세종은 혜빈 양씨에게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을 부탁했다. 혜빈 양씨는 단종을 친아들보다 더 극진히 보살폈다. 단종이 성장한 뒤에도 혜빈 양씨의 품에서 잠들기를 원했을 만큼 혜빈 양씨와 단종 사이는 각별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그 후궁은 궁을 나가야 하므로 혜빈 양씨 역시 궁을 떠나 비구니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하자 부름을 받은 혜빈 양씨는 다시 궁으로 들어와 임금을 보살폈다. 그러니 수양대군으로선 그녀가 눈엣가시였다. 더욱이 그의 세 아들은 혜빈의 위세를 등에 업고 단종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으니 수양대군으로서는 더이상 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궁중을 장악하기 전에 혜빈 양씨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를 내세워 그녀의 작위를 숙빈으로 삼아 혜빈 양씨보다 서열을 높여 주었다. 그렇게 하여 내명부의 일을 숙빈 홍씨에게 맡기게 함이었다. 마침 홍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권력이 홍씨에게 집중될 위험성이 전혀 없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그녀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단종의 마음이 혜빈 양씨를 향해 있는 이상 수양대군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왕권이 강화되고 단종의 주위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정적을 모두 제거해야만 했다. 그 대상으로는 혜빈 양씨와 그녀의 주변 인물이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넷째동생인 금성대군까지 제거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사유로 대역죄인 역모죄를 이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금성대군은 무사들과 은밀히 결탁하고 그 일당에게 후히 정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친족 최도일의 딸을 단종비로 세우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온갖 계교로 왕실을 이간질하였다.”

“혜빈양씨는 상궁들과 결탁하여 그들에게 노비를 하사하는 등 권세를 부리며 은밀히 서로 왕래하였다.”

“혜빈 양씨의 아들들은 경혜공주 부부와 결탁하여 권세를 부리고 불법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저질렀다.”
< 세조실록> 세조 1년 윤6월 11일 기사 중에서

여러 죄목을 열거하였지만 역모죄로 엮기에는 너무나 어설프다. 군사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모를 모의한 근거도 없다. 얼마나 명분이 없었으면 상궁들과 노비를 하사하며 왕래하는 일을 역모의 근거로 제시했을까? 또한 무사들에게 후한 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금성대군을 역모죄로 몰았다. 그리고 경혜공주 내외도 수양대군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혜빈 양씨와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생 단종을 키워준 분이라면 경혜공주에게도 혜빈 양씨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을 가까이 모신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수양대군은 경혜공주를 제거할 명분이 없으니 혜빈 양씨와 결탁하였다는 이유로 역모죄를 씌웠다.

그렇게 하여 수양대군은 단종의 주위 사람들 모두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혜빈 양씨와 그의 세 아들,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경혜공주 남편이자 단종의 자형)을 귀양 보내니 단종은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2. 성삼문의 눈물

왕위 찬탈 하루 전날인 윤6월 10일 수양대군은 기막힌 인사이동을 기획했다. 즉 옥쇄를 관할하는 동부승지 자리에 한명회가 있었는데 그를 우부승지로 옮기고 당시 예조참의였던 성삼문을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왕위를 찬탈하는 역사의 현장에 성삼문을 이용하려는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동부승지가 된 성삼문은 꼼짝없이 옥쇄를 넘겨주는 일을 맡아야만 했다. 그날의 일을 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삼문은 옥쇄를 들고 경회루로 나아가 내관 전균에게 전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세조가 엎드려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기사 중에서

또한 그날 분함을 참지 못한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했다. 그러자 성삼문이 말리기를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고, 우리들이 살아 있으면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니, 박팽년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세종은 일찍이 혜빈 양씨 소생인 서자 영풍군을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사돈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박팽년은 사위 집안을 도륙한 수양대군과는 결코 한 배를 탈 수 없는 견원지간의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팽년이 훗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가장 앞장을 섰던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3. 혜빈 양씨의 최후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역모에 관련된 혜빈 양씨,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의 목숨을 세조에게 구걸하였다. 즉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왕좌에서 물러나는 조건부 빅딜이었다. 어차피 왕위를 뺏길 바에야 이들의 목숨이라도 구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단종 3년 윤6월 11일, 마침내 단종은 어지를 내렸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나라 안팎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세조실록> 세조 1년 윤6월 11 기사 중에서

결국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며 주변 인물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귀양을 보냈다.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정종은 영월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단종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양씨를 죽이지 말라는 상왕의 부탁을 전하(세조)께서 허락하신 것은 사사로운 허락에 불과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조그마한 신의를 저버리시고 대의를 쫓는다 해서 신의를 잃을 것이 없으니, 청컨대 법에 의해 처단하소서.”

< 세조실록> 세조 1년 8월 27일 기사 중에서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다섯 달을 넘기지 못하고 조정의 여론을 핑계로 혜빈 양씨를 귀양지에서 교형(목매다는 형벌)으로 죽여 버렸다. 그리고 풍수에 관하여 수양대군에게 자주 맞섰던 목효지도 이때 함께 죽였다. 또한 경혜공주가 어려서 궁 밖 조유례의 집에 피접 나가서 살았는데 그 조유례도 함께 죽였다. 모두 억울한 죽음이었다. 혜빈 양씨와 함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그녀의 아들 영풍군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 세조 즉위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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