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4. 항일의병(抗日義兵) 운동과 진주(晉州)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4. 항일의병(抗日義兵) 운동과 진주(晉州)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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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0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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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항일 운동 중 가장 적극적이였던 진주지역 의병운동

의병운동 1894년 일어났으나 이듬해 전국적으로 확대
진주의병운동 1896년 노응규가 함양에서 일으켜 시작

창의(倡義) 3일 만에 진주성 점령…고종에 창의소 올려
진주성 점령되자 성 안팎으로 진주의병진 수천 명 군집

노응규 총대장으로 진주의병들 고성·하동 등 인근 장악
진주성 지키던 경무관 김세진과 의령서 싸워 이기기도
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온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오늘날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을 찍은 사진. 사진=국가보훈처
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온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오늘날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을 찍은 사진. 사진=국가보훈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저항 운동이 진주 지역의 의병 운동이었다. 의병은 이미 갑오년(1894)부터 일어났으나, 전국으로 확대되기는 이듬해 을미년 민비시해(閔妃弑害)와 단발령(斷髮令)의 공포로 일제의 침략이 뚜렷이 드러나면서부터였다.

진주에서의 의병 활동은 1896년2월17일 노응규(盧應奎)가 진주 인근의 함양 안의(安義)에서 의병을 일으킨 데서 비롯한다. 노응규는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킨 당일에 안의 장수사(長水寺)에 딸린 용추암(龍湫庵)의 승려 서재기, 문인, 정도현, 박준필, 최두연, 임기홍 등과 전 사과(司果) 임경희, 선비 성경호 같은 15여 명과 함께 바로 진주로 향했다. 진주 향교에 도착한 이들은 촉석성 안의 동정을 살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 의병들을 이끌고 2월20일 일시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진주성은 관찰사 조동필과 경무관 김세진이 지키고 있었는데 의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의병들이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순검 두 사람을 비롯해 여나믄 사람이 살해되고, 관찰사 조병필, 경무관 김세진 등의 관리들은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는 고종에게 창의소(倡義所)를 올려, “절사(節士)는 목숨을 경솔히 버리지 않으며, 의리를 붙잡는 것은 군자의 의무이기에 적개심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하여 창의의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석 달 안에 왜적을 몰아내고 선왕의 문물과 토지를 회복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한편 노응규의 의병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다음 성 안에 주둔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 부민들 또한 봉기하여 정한용(鄭漢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성 바깥에 포진하였다. 이어 전 찰방(察訪) 오종근, 전 수찬(修撰) 권봉희, 정재규 같은 이들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함으로써 진주의병진의 규모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라 노응규를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진은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웃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2월27일에는 서재기(徐再起)를 단성에 파견하여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하동, 고성, 함안 등도 영향권 아래에 두기도 했다. 단성 군구는 민보군(民保軍) 50여 명을 의병에 가담시키는 활동에 적극 협조하여 죽음을 모면하였고, 고성과 하동 군수는 의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났는가 하면, 하동 군수는 의병들에 의해 처단되었다.

의병이 장악하는 지역이 점차 확대되자 노응규는 성내의 행정 공백을 없애려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방(榜)을 인근에 붙였다. 그리하여 경륜이 뛰어난 사람, 도략(韜略: 군사 전략)이 출중한 사람, 책략에 능통한 사람, 체력이 출중한 사람을 초빙하여 여러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의 모집을 위하여 모든 면리(面里)에 전령을 보내 두 집에 군사 한 사람씩을 내도록 하였다. 한편 의병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삼장사와 논개의 의기사에 제사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부대를 정비한 진주의병의 수가 당시 수천 명에 달했다.

이 무렵 대구로 달아났던 경무관 김세진이 영남 영병(營兵) 60여 명을 이끌고 진주 의병을 진압하고자 진주 동북방 70여 리에 위치한 의령에 도착하였다. 진주 의병소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선봉장 서재기(徐再起) 등으로 하여금 540여 명의 병사를 이끌게 하고 그날 밤 의령으로 나아갔다. 진주 의병은 의령 정암진(鼎巖津) 일대에서 관군과 네 차례 공방전을 벌여 관군 3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전리품을 빼앗은 뒤에 회군하였고 이로써 사기가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진주 참서관(參書官) 오현익(吳顯益)이 중방(中房)들과 더불어 삼가의 토곡까지 도주했으나 요로에 배치한 방수군(防戍軍)이 붙잡아 진주로 압송해왓다. 의병들은 그들을 무수히 난타하고 큰 칼을 씌워 옥에 가두고 심문했는데, 오현익의 옷 속에서 진주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서한과 동래부 관찰사에게 일본군 지원을 요청하는 자신의 서한이 나왔다. 여기에서 을미왜란(乙未倭亂) 이후 고종이 각지의 의병장에게 의병 궐기를 고무하는 밀지(密旨)도 있었는데, 충청도 류인석(柳麟錫), 강원도 민용호(閔龍鎬), 경기도 김하락(金河洛) 의병장 등에게 내린 것과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호에서도 진주를 중심으로한 항일 의병 운동(1910년대 까지)과정을 계속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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