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5.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晉州)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5.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晉州) (상)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5.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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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저항운동 중 가장 핵심인 ‘형평운동’

형평사의 결성과 형평운동의 최초 발상지 진주
백정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저항운동
백정 동석 예배, 교육 차별 등이 형평운동 발단

백정들 신분 해방위해 ‘형평사’ 사회운동단체 설립
‘형평사’ 1923년 설립 1930년 중반까지 진주서 활동
광림학교 설립 맴버 1910년대 ‘형평운동’ 운동 주역
진주시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에 위치한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시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에 위치한 형평운동 기념탑.

1200년대 고려조 신종 때부터 시작된 저항(抵抗)의 도시인 이곳 진주는, 1500년대로부터 1900년대까지는 주체(主體) 및 호의실천(好義實踐)정신을 기치(旗幟)로 하는 소위 조식남명(曺植南冥)의 유학실천(儒學實踐)사상의 영향으로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인권운동(人權運動)이 전개된 도시이다. 그들 중 몇가지가 1800년대에서 1900년대 초기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진주농민운동, 진주동학운동 그리고 진주항일의병 운동 등이었다.

본 호에서는 전대에 우리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여러 저항운동들 중에 그 정수(精髓)라고 볼 수 있는 인권상승(人權上昇)의 절대적 핵심운동인 소위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정신(晉州精神)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진주에서는 백정(白丁)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저울대(衡)처럼 평등한 인권 보장 사회를 이룩하자는 목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형평사(衡平社: 일제 강점기인, 1923년 4월에 진주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처음 설립된 사회운동단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진주의 역사에서 형평사의 결성과 형평운동의 최초 발상지로서의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므로, 아울러 형평사 결성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형평사의 중요 활동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백정(白丁)이란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으로 도살(屠殺)이나 피혁(皮革) 제품의 제조와 가공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양민들이 사는 마을에서도 함께 살 수 없어 마을 변두리에 따로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옷차림이나 집안의 치장도 일반인들과 달랐으며 함께 걷는 일이 있더라도 한두 걸음 뒤떨어져 걸어가야 했다.

원래 백정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 의해 법률상으로는 천인분(賤人身分)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1920년대 당시까지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였다. 또한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신분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써서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나 학교 입학 원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하였다. 특히 백정에 대해서는 호적상 도한(屠漢 : 짐승 잡는 사내라는 뜻)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하여 신분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진주 지방에서 형평운동의 조짐은 1909년 3월에 호주인 선교사 리알(D.M Lyall, 羅大碧) 목사가 부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리알 목사는 진주교회의 상조회 회장인 손세영씨와 만나서 백정 신도라고 해서 별도로 예배를 하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고 백정 신분을 천대하거나 차별하여서는 안된다고 설득하여 일반 신도들과 예배를 같이 보도록 하는데 찬동과 협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도로 휘장을 치고 동석 예배를 행하여 동요가 없었으나 휘장을 걷어내고 일반 신도와 함께 정식으로 동석 예배를 실시하자 일부 신자가 이를 거부해 퇴장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백정의 동석 예배 문제는 목사가 교회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해 이를 최소함으로써 일단 수습되긴 했으나, 이후 백정 자녀의 학교 입학 문제가 새로 대두하였다. 1909년 8월 30일 교회 안에 설립했던 남학교인 안동학교와 여학교인 정숙학교를 합쳐서 사립 광림학교로 설립하는 것을 승인받으면서, 광림학교 설립 추진 맴버들이 1910년대의 백정 차별 철폐운동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 운동 의식이 있던 일부 청장년이 가세하면서 점차 형평 운동의 터전이 마련되어 갔다.

당시 광림학교 설립 추진 위원인 신현수(申鉉壽), 강달영(姜達永), 강상호(姜相鎬), 강대창(姜大昌)을 비롯한 서른두 사람이 학교 설립 기금을 모으려고 보천교(普天敎: 1921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창시된 증산교계열의 신종교)도로 가장하여 정읍에서 열리는 보천교도 확대 축하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보천교에서 진주보천교도대회 개최 명목으로 지급받은 돈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형평사(衡平社)라는 조직을 구상하게 되었다. 형평(衡平)이란 명칭은 백정들이 고기를 팔 때 쓰는 저울에서 취한 것으로 백정과 상민(常民)이 저울과 같이 고른 사회를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형평사의 결성을 추진 중에 백정인 재산가 이학찬(李學贊)의 자제 입학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안동 옥봉리에 거주한 이학찬은 다른 지방의 백정들이 그들의 자제를 도시나 일본 등에 많이 유학시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공립학교에 자제를 입학시키려 했으나 거절 당한 일이 있었고 이후 제삼야학교(第三夜學校)에 일백 원의 기부금을 내고서 입학시켰는데도 일반 학부모들이 자제들의 등교를 거부하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23년 3월 이학찬은 일신고등보통학교의 교사부지 정리의 부역을 나갔다가 백정 자제는 입학시키지 않으므로 백정의 부역은 대금으로 청산한다면서 백정의 부역을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이학찬은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형평사를 추진하고 있던 신현수(申鉉壽)와 강상호(姜相鎬) 등에 호소하자 형평사 준비위원들은 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처해 나아가기로 했다. 다음 호에서도 1920년대의 진주형평운동 전개 상황을 계속 기술하기로 한다.

1200년대 고려조 신종 때부터 시작된 저항(抵抗)의 도시인 이곳 진주는, 1500년대로부터 1900년대까지는 주체(主體) 및 호의실천(好義實踐)정신을 기치(旗幟)로 하는 소위 조식남명(曺植南冥)의 유학실천(儒學實踐)사상의 영향으로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인권운동(人權運動)이 전개된 도시이다. 그들 중 몇가지가 1800년대에서 1900년대 초기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진주농민운동, 진주동학운동 그리고 진주항일의병 운동 등이었다.본 호에서는 전대에 우리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여러 저항운동들 중에 그 정수(精髓)라고 볼 수 있는 인권상승(人權上昇)의 절대적 핵심운동인 소위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정신(晉州精神)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진주에서는 백정(白丁)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저울대(衡)처럼 평등한 인권 보장 사회를 이룩하자는 목적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형평사(衡平社: 일제 강점기인, 1923년 4월에 진주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처음 설립된 사회운동단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진주의 역사에서 형평사의 결성과 형평운동의 최초 발상지로서의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므로, 아울러 형평사 결성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형평사의 중요 활동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백정(白丁)이란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으로 도살(屠殺)이나 피혁(皮革) 제품의 제조와 가공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양민들이 사는 마을에서도 함께 살 수 없어 마을 변두리에 따로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옷차림이나 집안의 치장도 일반인들과 달랐으며 함께 걷는 일이 있더라도 한두 걸음 뒤떨어져 걸어가야 했다.원래 백정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 의해 법률상으로는 천인분(賤人身分)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1920년대 당시까지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였다. 또한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신분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써서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나 학교 입학 원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하였다. 특히 백정에 대해서는 호적상 도한(屠漢 : 짐승 잡는 사내라는 뜻)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하여 신분이 드러나도록 하였다.진주 지방에서 형평운동의 조짐은 1909년 3월에 호주인 선교사 리알(D.M Lyall, 羅大碧) 목사가 부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리알 목사는 진주교회의 상조회 회장인 손세영씨와 만나서 백정 신도라고 해서 별도로 예배를 하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고 백정 신분을 천대하거나 차별하여서는 안된다고 설득하여 일반 신도들과 예배를 같이 보도록 하는데 찬동과 협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도로 휘장을 치고 동석 예배를 행하여 동요가 없었으나 휘장을 걷어내고 일반 신도와 함께 정식으로 동석 예배를 실시하자 일부 신자가 이를 거부해 퇴장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백정의 동석 예배 문제는 목사가 교회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해 이를 최소함으로써 일단 수습되긴 했으나, 이후 백정 자녀의 학교 입학 문제가 새로 대두하였다. 1909년 8월 30일 교회 안에 설립했던 남학교인 안동학교와 여학교인 정숙학교를 합쳐서 사립 광림학교로 설립하는 것을 승인받으면서, 광림학교 설립 추진 맴버들이 1910년대의 백정 차별 철폐운동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 운동 의식이 있던 일부 청장년이 가세하면서 점차 형평 운동의 터전이 마련되어 갔다.당시 광림학교 설립 추진 위원인 신현수(申鉉壽), 강달영(姜達永), 강상호(姜相鎬), 강대창(姜大昌)을 비롯한 서른두 사람이 학교 설립 기금을 모으려고 보천교(普天敎: 1921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창시된 증산교계열의 신종교)도로 가장하여 정읍에서 열리는 보천교도 확대 축하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보천교에서 진주보천교도대회 개최 명목으로 지급받은 돈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형평사(衡平社)라는 조직을 구상하게 되었다. 형평(衡平)이란 명칭은 백정들이 고기를 팔 때 쓰는 저울에서 취한 것으로 백정과 상민(常民)이 저울과 같이 고른 사회를 만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이렇게 하여 형평사의 결성을 추진 중에 백정인 재산가 이학찬(李學贊)의 자제 입학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안동 옥봉리에 거주한 이학찬은 다른 지방의 백정들이 그들의 자제를 도시나 일본 등에 많이 유학시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공립학교에 자제를 입학시키려 했으나 거절 당한 일이 있었고 이후 제삼야학교(第三夜學校)에 일백 원의 기부금을 내고서 입학시켰는데도 일반 학부모들이 자제들의 등교를 거부하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23년 3월 이학찬은 일신고등보통학교의 교사부지 정리의 부역을 나갔다가 백정 자제는 입학시키지 않으므로 백정의 부역은 대금으로 청산한다면서 백정의 부역을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이학찬은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형평사를 추진하고 있던 신현수(申鉉壽)와 강상호(姜相鎬) 등에 호소하자 형평사 준비위원들은 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처해 나아가기로 했다. 다음 호에서도 1920년대의 진주형평운동 전개 상황을 계속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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