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5.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晉州) (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5.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진주(晉州) (하)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5.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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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 전국에 확산되며 발전했으나 이념 갈등에 퇴조
형평사발기 기성회 발기·창립 축하식 후 형평운동 확산

진주에 본사 두고 전국에 지사·분사 만들어 전국에 전파
1923년 말 전국에 지사 12곳·분사 67곳 등 급속한 발전

형평사 본사 서울 이전 문제 제기되며 이념적 갈등 시작
형평활동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으로 확대되면서 갈등 본격
결국 형평사 해소론 나오며 점차 퇴조 일본식민통치도 한몫
형평사 창립 축하 행사가 열렸던 진주좌(옛 진주극장 자리). 행사장은 당시 진주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으며 진주지역의 저명한 인사들이 축사와 강연을 행했다. 이 행사를 통해 형평사의 창립은 전국 백정들의 관심사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됐다.
형평사 창립 축하 행사가 열렸던 진주좌(옛 진주극장 자리). 행사장은 당시 진주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으며 진주지역의 저명한 인사들이 축사와 강연을 행했다. 이 행사를 통해 형평사의 창립은 전국 백정들의 관심사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됐다.

1903년 3월부터 호주인 선교사 리알(D.M Lyall)로부터 시작된 진주지역의 형평운동은 1910년대에 와서 광림학교 설립 추진 위원들인 신현수, 강달영, 강상호, 강대창, 정창화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후 당시 명치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후에 형평운동의 주도 역할을 한 장지필(張志弼)이 참가하면서부터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도한(屠漢)’이라는 호적부의 기록 때문에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는 것을 단념하고 이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리하여 1923년 4월 24일 진주 청년회관에서 대략 일흔 너머 사람의 사회운동가들과 백정들이 회합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을 위한 목적으로 이 모임을 형평사발기(衡平社發起) 기성회(期成會)로 하고, 그 다음날 발기 총회를 다시 열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대략 여든 너머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형평사 발기 총회가 열렸다. 백정 출신이 아닌 강상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여러 가지 중요 사항이 결정되었다. 규칙과 기본 조직을 정비하고 사업 내용을 토의하며 임원을 선임하였다. 참석자들은 이 모임을 전국적인 사회 운동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조직을 본사, 지사, 분사 체제로 구성하였고, 진주에 본사를 두고 여러 다른 도에는 지사를 두며, 도 아래 군에는 분사를 두기로 했다. 임원으로는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찬을 선임하였다. 여기에는 사대부 집안 출신의 사회운동가뿐만 아니라 진주지역의 부유한 백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회의 마지막에는 형평사의 주지(主旨)도 의논하여 정하였다.

발기 총회를 마친 형평사는 5월 13일에 창립 축하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선전대(宣傳隊)를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예정대로 극장 진주좌(옛날 진주극장 자리)에서 축하식을 열었으며, 이것이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석 인원이 사백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부산, 마산, 밀양, 김해, 거창, 의령, 통영, 창원, 함안, 합천, 남해, 산청, 진해, 하동 등의 경남지역 뿐만 아니라 대구, 논산, 대전, 옥천 같은 중부권에서 온 대표자도 있었다.

행사장은 당시 진주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으며 진주지역의 저명한 인사들이 축사와 강연을 행했다. 수백 명의 백정들이 모여 백정 해방과 인권 평등을 공개적으로 주창한 이 행사를 통해 형평사의 창립은 전국 백정들의 관심사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원지로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행사가 끝난 다음 형평사 간부들은 경남 경찰부를 방문하여 민적의 백정 신분 표시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경찰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모든 군청에 시정을 지시하였다.

이후 모든 지역의 형평사 지도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은 형평운동 확산에 진력하면서 형평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1923년 말 즈음 전국의 형평사 조직은 지사 열두 곳, 분사 예순일곱 곳에 이르렀다. 형평운동의 급속한 발전은 보수 사회의 반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1924년 5월에는 진주에서 소고기 비매 동맹이 조직되고, 7월에는 경남 삼가에서, 8월에는 김해와 충북 제천에서 형평운동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1923년 11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전조선 형평 대표자 회의에서 본사 이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진주는 너무 외져서 형평운동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논의를 거듭하다가 형평사 혁신회의 주장에 의해 본사를 서울로 이전할 것이 결정되었다. 진주지역의 인사들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결국 혁신회에서 서울 도렴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본사 간판을 내걺으로써 형평사는 두 곳에 본부를 두게 되었다.

두 파벌은 1924년 4월 25일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진주와 서울에서 따로 거행하는 등 제각기 활동을 전개하였다. 두 쪽은 사원들의 차별 철폐 문제나 인권 문제와 교육 문제 등에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경제적 측면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소 달랐다.

진주파의 사업 계획에는 경제 문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된 반면에 서울파에서는 피혁회사 설립, 도부 고정 임금제 도입, 제품의 공동 판매 추진 같은 적극적이면서도 다소 진보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진주가 지리적으로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의 협력이 쉽지 않았던 반면에, 서울로 옮긴 이후에 다른 사회 운동과의 협력 관계가 더욱 긴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형평운동은 사회운동계의 일각을 차지하는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형평운동은 그런 파벌 싸움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발전하여 형평사 아래 여러 성격의 하부 단체들이 생겨났다. 진주의 일부 사원들은 1924년 3월 31일 형평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 되면서 1925년 가을에 전북 형평 청년연맹이 결성되었다. 11월에는 전영동(全嶺東)형평 청년연맹이, 12월에는 서울에서 전국 규모의 형평 청년연맹이 조직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형평사의 활동이 신분해방을 뛰어넘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으로까지 활동 영역이 확대되면서 형평사 지도자들 사이에 이념적 갈등이 고개를 들었다. 형평운동의 지향과 성격에 대한 지도부의 입장차이는 1931년 형평사 해소론 파동으로 이어졌다. 이해 봄 수원 분사에서 처음 일어난 해소론은 사회주의 활동 노선에 입각한 것으로 형평사가 그간 사원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데는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급투쟁에 장애가 되었다고 하여, 비계급적이고 비대중적인 지금의 단체를 해체하고 노동조합 건설에 참여하여 계급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급진적인 좌파 사원들이 주도한 이런 제안은 그 뒤로 형평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해소안이 계속해서 회의에 상정되면서 형평운동은 점차 퇴조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형평운동의 퇴조는 형평사 안에서의 좌우 대립뿐만 아니라 세계공황의 여파로 인한 전통 산업의 불황으로 사원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 데도 원인이 있었다. 여기에 만주 사변과 대륙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가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형평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매우 암울했던 시기에, 진주에서 시작된 진주인의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 형평운동은 명실공히 한국사회운동의 최초의 발원지로서 진정 위대한 역사적, 사상적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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