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6. 근대 도시로 진주(晉州)의 발전과정(發展過程) (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6. 근대 도시로 진주(晉州)의 발전과정(發展過程)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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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0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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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역사 거쳐 경상남도 29군을 관할했던 진주

조선조 전국 행정구역 나눈 군현제·팔도제도 시행
군현제·팔도제, 지방제 근대적 개혁 추진되며 변모
8도제→23부제→13도 개편 경상도 남·북으로 나눠
진주부, 경상남도 관찰부 되면서 29군 75개 면 관할

일본 개입되면서 진주 관할 75개→50개→19개 축소
조선총독부 진주를 일본인과 함께 사는 도시로 조성
도청소재지, 상공업 발달 등의 이유로 지정면 선정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 정문.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 정문.

조선조부터 시작된 전국의 행정 구역을 목(牧), 부(府), 군(郡), 현(縣)으로 나누어 중앙에서 모든 지방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리도록 했던 군현제(郡縣制)와 동시에 수령을 적절히 통제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전국을 여덟 개의 도(道)로 나누어 모든 도(道)에다 관찰사(觀察使)를 임명하여 도내 수령을 감독하도록 하는 팔도제도(八道制度)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군현제와 팔도체제는 1894년 갑오경장 이래 지방 제도의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면서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895년에 이르러 종래의 팔도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전국을 스물세 부(府)의 관할 구역으로 새로 확정하고 그 아래 목, 부, 군, 현의 고을 명칭을 모두 군으로 일원화하였다. 동시에 종래 지방관에게 부여하였던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하였다. 이때 경상도는 진주부, 동래부, 대구부, 안동부의 네 개 부로 나누어 저마다 스물한 개 군, 아홉 개 군, 열일곱 개 군을 소속시켰다.

스물세 부제는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친일개화파 정권이 무너지면서 폐지되어 다시 전국은 열세 도로 개편되었는데, 종전의 경상도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누어지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때 경상남도의 관찰부가 진주에 두어짐으로써 관찰부는 한 부에 스물아홉 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 뒤에 침략 일본의 통감부는 우리나라의 지방 행정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즉 1906년 4월에 내부(내무부) 안에 지방제도조사위원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다. 이때 열세 도는 그대로 두었으나 일부 군의 통폐합과 함께 군의 구역을 대폭 바꾸었다. 이때부터 진주는 종래의 일흔다섯 면 가운데서 파지, 백곡, 금만, 사월, 삼장, 시천면을 산청군에, 북평, 종화, 가서, 운곡, 청암, 대야, 정수면을 하동군에, 문선, 남양, 영현, 영이곡, 오읍곡, 개천면을 고성군에, 상봉, 하봉, 상사면을 함안군에, 양전면을 지해군에, 적양, 창선면을 남해군에 넘겨줌으로서 진주는 쉰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진주군(晉州郡)으로 행정 구역상 약간 추락됐다고 볼 수 있다.

경상남도 관찰부가 있었던 진주성 전경.
경상남도 관찰부가 있었던 진주성 전경.

또한 한일합방 뒤로 침략 일제의 총독부는 1913년 10월에서 1914년 4월에 걸쳐 군(郡)과 면(面)을 마음대로 섞어서 없애고 보태어 군과 면의 수를 많이 줄였다. 통감부 뒤로 진주군의 면이 50여 개였던 것을 19개로 줄이고, 그때까지 진주군에 들어있던 부화곡면과 축동면을 사천군으로 옮기고, 함안군에 넘어갔던 상봉, 하봉, 상사면을 다시 진주부로 싸잡아서 영역을 새롭게 바꾸었다. 이런 과정에서 진주 관아 가까이 있는 면(面)들을 모아서 진주면으로 만들었다.

이때 진주면으로 포함된 지역은 성내면, 중안면의 대부분과 대안면, 봉곡면의 일부였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는 면제(面制)와 면제시행규칙(面制施行規則)을 공포하면서 전국 23개 면을 지정면(指定面)으로 정하였다. 지정면이란 장터가 활발하고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함께 모여 살고 그 여건이 부(府)에 가까운 면을 골라 특별히 정한 것인데, 진주면이 지정면에 들어갔다.

지정면에서는 일본인이 면장으로 임명될 수 있고, 면장의 자문가관으로 도장관이 임명하는 상담역이라는 것을 두게 했으며, 지정면에 한하여 재정차관(財政借款) 즉 기채起債,빚을 내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진주는 당시 부는 되지 못했지만 도청 소재지였고 인구가 비교적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재정이 튼튼한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에 지정면이 될 수 있었다. 이듬 해 5월에는 진주면의 규모를 좀더 키워서 일곱 개 동(내성, 중성,동성, 대안, 중안, 평안, 비봉동) 그리고 3개리(상봉, 옥봉, 천전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지방자치를 실시한다는 명목아래 1920년 7월에 일련의 새로운 법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다음호에서 그 법령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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