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7화 사육신 이야기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7화 사육신 이야기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6.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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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몫을 내놓았던 사육신

정통성 없던 세조, 왕권 지키기 위해 친단종 세력 제거
단종복위사건 때 죽은 자만 500~800명…많은 목숨 잃어

사육신, 생육신 남효온의 판단에 따라 충신으로 이름 남아
그러나 육신 외 육종영·삼상신·사의척·삼중신 등 충신 많아
이에 정조는 육신 외 단종 위해 충성 바친 신하들도 제사

1978년 서울시 충절 위로하고 기리고자 사육신 공원 조성

사육신공원 내 불이문. 이 문을 지나면 사당이 나오고 묘역에 들어서게 된다.
사육신공원 내 불이문. 이 문을 지나면 사당이 나오고 묘역에 들어서게 된다.

1. 사육신이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충직한 많은 신하들이 세조에게 저항하였다. 정통성이 없는 세조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단종복위사건을 계기로 세조는 친단종 세력을 제거하게 되는데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때 죽은 자만 500명에서 8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을 제외하고 이만큼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드물다.

그러니 이는 국가적 재앙에 가까웠다. 조선의 역사가 세조의 후손에 의해 계승되었기 때문에 이 재앙은 덮이고 묻히고 하여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그 대표가 사육신이다.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몫을 내놓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은 같을진대 어찌 성삼문 등의 여섯 신하만 충신이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명의 이름만이 역사에 길이 남아 그 충심을 높이 사게 된 이유는 생육신 중에 한 명이었던 남효온에 의해 비롯하였다. 그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여섯 신하의 일대기를 전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람들이었고, 이때부터 ‘사육신’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을 뽑은 것은 남효온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이 단종 복위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꼭 여섯이어야 할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정조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공인하면서 기존의 사육신 이외에 육종영(六宗英), 삼상신(三相臣), 사의척(四懿戚), 삼중신(세 명의 중신들), 양운검(兩雲劒) 등을 더하여 절의를 지킨 분들을 숭상하는 범위를 넓혀 장릉(단종릉)의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에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육종영은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6명의 종친을 가리킨다. 안평대군(세종의 3남), 금성대군(세종의 6남), 화의군(세종의 서자), 한남군(세종의 서자) 영풍군(세종의 서자), 하령군(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의 손자) 등이 있다.

△ 삼상신은 계유정난 때 죽은 정승이다.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이 있다.

△ 사의척(四懿戚)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외척이다. 송현수(단종의 장인), 정종(문종의 사위), 권자신(단종의 외숙부), 권안(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부친) 등이 있다.

△ 삼중신(三重臣)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 판서이다. 조극관(이조판서), 민신(병조판서), 김문기(공조판서) 등이 있다.

△ 장수로서 죽은 양운검(兩雲劒)은 성승(지중추원사, 성삼문의 아버지), 박쟁(첨지중추원사) 등이 있고, △ 주동자로서 죽은 육신(六臣)은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이다.

2. 사육신 공원

서울시에서는 1978년에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작구 노량진동에 사육신 공원을 조성하였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의 허묘(墟墓)도 함께 더하여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삼중신에 해당하던 김문기의 후손들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는 진정을 냈다. 그들은 <세조실록>에는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성삼문 등 다섯 사람과 나란히 이름을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한 달 이상 고심하던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듯이 사육신의 개념은 남효온에 의해 비롯된 말이므로 세조실록이나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표현이다. 그래서 김문기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문기가 사육신의 반열에 끼어든 것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자랑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김재규는 김문기의 후손으로 그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그의 조상을 사육신에 억지로 집어넣는 무리수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든 정조 때 김문기도 삼중신으로 공인을 받은 인물이니 그 충절만큼은 높이 평가하지만 사육신이라는 고유명사에 인위적으로 그 이름을 넣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그리하여 1982년 11월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킨 적이 없다고 발표하였고. 2008년에 와서는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사육신은 최초의 6인(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에서 변함이 없다고 재확인했다. 앞글에서 성삼문, 박팽년을 소개하였으니 나머지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에 대해 알아보자.

3. 유성원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뒤 공신들은 집현전에 명하여 수양대군의 공을 표창하는 교서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집현전의 관원이 모두 퇴청해 버리고 그때 유성원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유성원은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슬피 통곡하였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니 유성원은 단종을 복위하는 거사에 성삼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그날 유성원은 성균관에 있었다. 그런데 거사가 발각되어 성삼문이 먼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유성원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성삼문과 사돈지간이었던 유성원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부인과 함께 영결(永訣)의 술을 마시고 사당에 올라갔다. 유성원은 관대도 벗지 않은 채 사당 앞에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세조는 그의 죽은 시신을 끌어내 능지처참을 시킨 뒤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효수하는 형벌을 더했다.

4. 하위지

세종이 양성한 많은 인재 중에서 문종은 하위지를 첫째로 꼽을 만큼 그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조용하고 말이 적어 한 마디를 해도 가려서 하니 버릴 말이 없고,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며, 언제나 집현전에 있으면서 경연에 임금을 모시어 보좌한 바가 많았다. 어린 단종이 왕위를 계승한 뒤 숙부들의 기세가 강성하여 인심이 흉흉하고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에 막강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아뢰어 좌사간으로 불렀으나 병을 구실로 사양하였다.

후에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하위지를 간절히 불렀다. 한때 하위지가 예조 참판이 되어 세조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녹봉을 부끄럽게 여겨 먹지 않고 방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을 가두어 심문할 적에 세조는 그에게만큼은 불에 달군 단근질 고문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조는 하위지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도 능지처참 형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5. 유응부

유응부(兪應孚)는 무인으로 활을 잘 쏘고 용감하며 날래어 인가의 담을 뛰어 넘을 정도였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그를 믿고 중히 여기어 관직이 1품에 이르렀다. 병자년 거사에 성승과 더불어 별운검이 되어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궐 뜰로 잡혀갔는데, 왕이 묻기를, “너는 어찌 하려고 했느냐?”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에 내가 한 자의 칼로써 그대를 폐위하고 전 임금(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불행히 간신들에게 고발되었을 뿐이오. 내가 다시 무엇을 구하겠소? 그대는 다만 빨리 나를 죽이시오.”하였다.

세조가 진노하며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무릇 어머니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가난하여 저축해 둔 식량이 없어도 어머니를 봉양함은 일찍이 부족함이 없었다. 키가 보통 사람을 넘고 용모가 엄숙하고 씩씩하며, 지극히 청렴하여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한 점의 고기도 없고, 때때로 양식이 떨어져 아내와 딸이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죽는 날에 아내가 통곡하며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는 잘 도와주지도 못하고, 죽어서는 큰 화를 얻었다.”하였다.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

6. 이개

이개는 고려 말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초야에 묻혀 지낸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글을 잘하여 조부의 기풍이 있었다. 병자년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바로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대궐 뜰에서 묶이어 담금질을 당할 때 이개는 천천히 묻기를,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하였다. 생김새가 야위어 약하나 곤장 밑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장하게 여겼고, 끝내 굽히지 않아 성삼문과 함께 같은 날에 죽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나갈 때 지은 시가 전해진다.

우(禹)의 솥이 무거울 때 생명도 또한 크나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 가벼운 곳에 죽음 또한 영화롭다 / 鴻毛輕處死亦榮

새벽에 자지 않고 문을 나서니 / 明發不寐出門去

현릉(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 가운데 푸르고나 / 顯陵松栢夢中靑

*** 다음 이야기는 < 생육신 김시습의 울분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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