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9화 경혜공주 부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다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29화 경혜공주 부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다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6.2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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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에 저항하기 위해 남편 유배길 따라간 경혜공주

세조 정종 유배 보내고 경혜공주 부부의 재산과 직첩 몰수
단종복위운동 직후 수원에서 광주로 더 멀리 유배 보내버려
광주 유배생활 중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정미수 태어나

세조, 영양위 정조를 성탄 스님과 연루시켜 역모로 엮어
능지처참 후 시신을 토막 내 소금에 절여 팔도로 내려보내
순천 관노로 쫓겨 난 공주 “나는 왕의 딸이다” 외치며 저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경혜공주의 묘. 세조는 정종을 능지처참해 그 시신을 도막내어 소금에 절여서 지방관아로 내려 보냈다. 그래서 그의 시신이 남아있지 않아 후손들이 경혜공주 묘 오른쪽에 정종의 비석만 만들어 세웠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경혜공주의 묘. 세조는 정종을 능지처참해 그 시신을 도막내어 소금에 절여서 지방관아로 내려 보냈다. 그래서 그의 시신이 남아있지 않아 후손들이 경혜공주 묘 오른쪽에 정종의 비석만 만들어 세웠다.

1. 유배길

남편 영양위 정종이 수원으로 유배를 다시 떠나는 날, 경혜공주는 기어이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따라나섰다. 그것이 경혜공주가 선택한 세조에 대한 유일한 저항 방법이었다. 세조는 경기 관찰사에 명하여 매월 식량을 공급해 주었지만, 그것은 여론을 의식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수원으로 유배를 보낸 뒤 성록대부 직위마저 거두어버렸다. 그러더니 강화에 있던 경혜공주의 집과 토지는 몰수하여 세종의 서자 의창군에게 하사해 버렸고, 양주(揚州)에 있던 집과 토지는 신숙주에게, 배천의 집과 토지 및 광주(廣州)의 집과 토지는 내시 전균에게 하사해 버렸다.

세조 2년에는 그 유명한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수원에 유배 중이었던 경혜공주가 무얼 할 수 있었겠냐만 세조는 영양위 정종을 이 사건에 엮어 더 먼 곳(전라도 광주)으로 쫓아버렸다. 나머지 남아 있던 토지마저 모조리 몰수하여 한명회에게 하사해 버렸다.

2. 단종과 금성대군의 죽음

경혜공주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다. 정미수(鄭眉壽). 나중에 세조가 오래 살라는 의미로 미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곤 하지만 정미수의 신원마저 회복해 주지 않고 세조가 죽은 것을 보면 이는 사실과 다른 듯하다.

천금보다 더 값지게 얻은 아들. 그러나 기쁨은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어둠이 그들 부부에게 찾아왔다.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또 다시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나 사사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영월 청령포에 격리되어 있던 단종마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제 경혜공주에겐 아무런 희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 부부는 유배지에서 멀지 않는 암자에서 동생의 명복을 빌었다. 그곳은 성탄 스님이 불도를 닦고 있던 암자였다. 세조에 대한 울분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되었지만 그래도 성탄 스님으로부터 듣는 설법은 경혜공주 내외에겐 유일한 낙이었다.

그 즈음 세조는 그의 전정에 장애가 되는 사람이라면 모조리 제거해 가는 작업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단종을 죽였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 죽였다. 이제 남은 마지막 한 사람 그가 바로 영양위 정종이었다. 전라도 광주까지 귀양 온 영양위 정종이 무얼 할 수 있겠느냐만 그는 경혜공주의 남편이란 이유로 결코 살려둘 수 없는 대상이었다.

세조 7년 7월 26일. 전라도관찰사 함우치가 글을 올렸다.

광주에 안치한 정종이 지난 19일에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삼칠일을 먹지 아니하고 앉아 참선하여 지금 이미 성불하였고, 사리가 분신하여 향기로운 냄새가 방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연하였으니, 만약 계달(啓達)을 늦추면 이 고을 사람들을 특히 다 죽이겠다.” 하면서, 몸을 떨쳐 뛰어오르고 발로 문짝과 담장을 차며 망령되게 미친 말을 발하였는데, 수직하는 사람들이 주위를 살펴보니 바깥 문 위에 사람의 자취가 있으므로, 곧 찾아서 중 성탄(性坦)이란 자를 잡아서 단단히 가두고, 아울러 수직하는 사람과 일에 간여한 자를 가두었습니다. 정종이 가지고 있던 경문(經文) 한 종이를 올려 보냅니다. 정종이 외인과 교통하여 담을 넘어 불러들인 형상을 보면 잡인과 서로 통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명백하니, 죄악이 깊고 무겁습니다. 목사 유곡(柳轂)은 조금도 금방(禁防)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아울러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어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세조 7년 7월 26일 기사 중에서

세조는 함우치의 보고 글을 근거로 성탄과 정종을 역모로 엮었다. 정종이 미친 듯한 언행을 마구 하고 있으며 잡인들과 교통하고 소지하고 있던 경문 한 장이 역모의 근거였다. 군사를 동원하거나 임금을 모해할만한 증좌도 없는데 세조는 정종을 능지처참이란 죄목으로 죽였다. 그때 아들의 나이가 6살이었다.

정종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국문을 했을 때의 기록을 보자.

우승지 홍응(洪應)이 의금부에 가서 정종을 국문하며 앞으로 할 바를 물었다. 그러자 정종은 대답하길

“빨리 성상(단종)의 은혜를 입고자 할 뿐이며, 다른 뜻은 없습니다.”고 하였다.

단종의 곁으로 가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니 빨리 죽여 달라는 말이었다. 충신다운 모습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세조는 정종을 능지처참시킨 후 역모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시신을 조각내 전국으로 내려 보내 교훈으로 삼게 했다. 엽기적 살인이 아닐 수 없다.

3. 공주 순천 관노가 되다

경혜공주는 남편이 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했으니 공주의 신분이 박탈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순천의 관노가 되어 광주에서 순천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지만 <연려실기술> <월정집> 등에 전하는 걸 보면 근거 없이 떠도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연려실기술>을 인용해 보자.

정종이 유배지에 있다가 역모로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의자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 편> 기사 중에서

남편 정종이 역모에 엮이어 죽임을 당할 무렵 경혜공주는 미수의 동생을 잉태하고 있었다. 만삭의 몸이 되어 순천의 관노로 살아간다는 것은 공주에겐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딸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경외롭기까지 하다.

*** 다음 이야기는 < 현덕왕후의 폐위와 복위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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