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8. 논개(論介)의 충절정신(忠節精神)(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8. 논개(論介)의 충절정신(忠節精神)(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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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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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 여성 순국자 논개, 진주에서 비상하리라

논개 순국으로 진주성 1·2차 전투 역사적 정체성 확보
논개의 충절심과 순국 관련 보다 많은 문헌 자료 속출
당시의 신분이나 지위 초월한 민족정신 표출한 논개
‘어우야담’ 논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최초의 단서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고 있는 의기사(논개사당).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고 있는 의기사(논개사당).

논개(論介)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중에 순국(殉國)함으로써, 그의 충절정신(忠節精神)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크게 선양(宣揚)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성스러운 충절실천의 사실에 대한 진정성있는 문헌과 자료가 많지 않고, 산만하여 당해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과 학계의 전문학자들의 연구에 적지않은 혼선을 야기(惹起)시키고 있다.

본고에서는 가능한 객관성이 공인된 기존 문헌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충절정신을 기술해보고자 한다.

1593년 6월에 왜적들은 전년(1592년)도에 이어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그것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원한을 갚기위한 재침(再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진주성 공격의 총수(摠帥)인 가등청정(加籐淸正)에게 “진주성을 완전히 격파하고, 성안의 모든 사람까지 도살하라.”라는 일년전의 패배에 대한 강렬한 보복성 공격이었다. 10만여 명의 왜적은 6월 19일부터 진주성을 침략하여, 상호 11일간 결사항전(決死抗戰)하던 끝에 29일 진주성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충청병사 황진(黃進),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등 약 7만 군, 관, 민이 모두 순절하는 세계전사(世界戰史)상 전례없는 참상(慘狀)에 이르렀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적이 본성(本城, 진주성)을 무찔러 평지(平地)를 만들었는데 성 안에 죽은 자가 6만명이 넘었다. 어떤이는 8만여 명이라 하고, 또 어떤이는 3만여 명이라고 했다. 뒤에 감사 김늑이, 사근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시켜 조사하게 했는데, 성 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이고, 촉석루에서 남강의 북안(北岸)까지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쳤으며, 청천강(菁川江: 오늘날 남강을 말함)에서부터 옥봉리(玉峯里), 천오리(遷五里)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라고 기록되어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왜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자 왜군은 승리에 고무되고, 도취되어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하지만 한민족의 여장부인 논개(論介)가 순국(殉國)으로 왜적들의 기세를 꺾었으며, 이는 진정 진주성대첩에 이어진 또 하나의 역사적인 승리라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당시 누군가가 목격했을 것이다. 이 목격자에 의해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거룩하게 순국한 그 사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그렇다면 상기와 같은 논개의 순국사실이 공식적으로 문헌으로 기록된 자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내용은 얼마나 진실하게 기록됐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임진왜란 당시 충신과 열녀를 공식적으로 현창(顯彰)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는 논개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어 있는데, 기녀(妓女)를 표창할 수 없다는 유학자들의 편견 때문인 것 으로 사료된다. 그후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은지 28년후인 1621년, 최초로 논개의 순국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몽인(柳夢寅)의 《於于野談⟫이다. 그 내용을 원문과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原文>

「論介者晉州官妓也, 癸巳之歲, 金千鎰倡義使入, 據於晉州以抗倭, 及陷城, 軍敗人民俱死, 官妓論介凝粧覩服, 立於矗石樓下,岧巖之嶺, 其下萬丈入波江心, 群倭見而悅之, 皆莫敢近, 獨一倭挺然直進論介笑而迎之, 倭將誘而引之, 遂抱持其腰, 直投于潭俱死.」

<풀이>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게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상기의 《於于野談⟫에서 논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주 관기(官妓)였다는 점과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는 사실 뿐이다. 곧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은 진주관기라는 사실만이 최초의 기록에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공인 받기 위해서는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보다는 서책이나 금석문에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우선은 《於于野談⟫의 기록은 ‘논개의 순국’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최초의 단서(端緖)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호에서도 ‘논개’에 대해서 이후에 연이어 나타난 또 다른 문헌들을 중심으로 논개의 충절정신에 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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