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8. 논개(論介)의 충절정신(忠節精神)(하)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8. 논개(論介)의 충절정신(忠節精神)(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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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0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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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갖은 논란에도 나라 위해 순국한 것에는 변함없어

류몽인 ‘어우야담’ 중심으로 논개의 정체성 확보해야
논개 신분·출생지로 더이상 지역 간 갈등 조성 안 돼
의암·의기사 등 논개 문화재 국가 급으로 격상시켜야

논개가 임진왜란 당시 의암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사진은 지금의 의암바위 모습.
논개가 임진왜란 당시 의암바위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사진은 지금의 의암바위 모습.

지난호에서는 논개의 순국사실(殉國事實)과 충절사상(忠節思想)에 대한 진정성과 역사성 확보를 주로 류몽인의 《於于野談⟫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또한 그후에도 《어우야담⟫에 이어, 《湖南節義錄⟫, 《湖南三綱錄⟫등 10여편 이상의 논개 관련 문헌자료가 계속 출간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후대인들은 여전히 그의 신분, 출생지 심지어 임진왜란 때의 그의 순국행위 까지도 의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우선은 그의 순국행위와 충절정신이 위대함을 넘어 거룩함을 또 다른 자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혹자는 《어우야담⟫의 내용이 문헌설화이므로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논개가 순국한 그 다음 해인 1594년 류몽인이 삼도순환어사(三道巡還御使)로 지방을 순회하던 중,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 이야기를 듣고 쓴 것으로 전해온다, 논개 순국 후 1년 뒤 직접 진주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두고 단순히 ‘야담’이라고 하여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지나친 무리라고 사료된다.

류몽인의 《어우야담⟫은 1권 인륜편(人倫篇)에 논개의 순국 사실이 실려 있다. 인륜편에는 효열(孝烈), 충의(忠義), 덕의(德義), 은둔(隱遁), 혼인(婚姻), 처첩(妻妾), 기상(氣象), 붕우(朋友), 노비(奴婢), 배우(俳優), 창기(娼妓) 등으로 구분하여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논개는 ‘효열(孝烈) 조’ 에 실려있다. 효충(孝忠)을 으뜸 덕목으로 여겼던 류몽인이 논개를 ‘창기(娼妓)조’에 싣지 않고 효열조에 실은 것은 논개 순국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이다.

단순히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처럼 높이 펑가하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몽인은 논개가 관기(官妓)라는 이유만으로 광해군 9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순국사실이 수록되지 않자, 편찬자들의 그릇된 시각을 비판하기도 햇다. 어쨌든 이 기록은 논개 순국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1561년(효종 2년)에 경상우도 지방의 재난 상황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吳斗寅)이라는 사람이 진주에 들렸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을 보고 촉석루에서 의암기(義巖記)를 지었으니, 정대륭(鄭大隆)이 글씨를 새긴 것은 1625∼1651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논개가 순국한 지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시기였다. 이 때 진주 사람들은 류몽인의 《어우야담⟫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논개의 순국을 직접 목격한 진주 사람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이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진주 사람들의 목격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논개 순국 사실은 류몽인의 《어우야담⟫<효열조>에 기록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한편으로 진주 사람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다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김으로써 논개의 순국사실을 역사적 기록물로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논개 순국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또 역사적 사실로 공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연후에 1721년(경종 1년)에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조정에 올리는 글에 최초로 ‘義妓’라는 표현을 쓴 후 10여년이 지난 뒤 조정으로부터 ‘의기’라는 호칭도 받게 되었다. 이 후로 관기(官妓)였던 논개는 ‘義妓論介’라는 호칭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상기의 논개관련 문헌 자료인 《어우야담⟫외의 논개관련 문헌자료들(1.호남절의록, 2.호남삼강록, 3.호남유지, 4.청구야담, 5.명암집, 6.소계문, 7.동감강목, 8.대동기문, 9.의기전, 10.의기시기, 11.장수읍지, 12.민순지의 임진록 등)이 있다. 그들 내용은 각각 문헌나름대로의 주장과 내용이 매우 상이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후대 관련 학자들이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논개는 결코 관기(官妓)가 아니다.’라는 문헌 자료(日休堂實記) 1편을 본문과 함께 참고로 소개해 본다.

《日休堂實記⟫-海州崔氏實記六義錄發刊推進委員會-

「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江中巖石, 誘敵將因濟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呼.」

(공 (여기서 공은 최경회를 지칭함)의 부실은 공이 죽던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결국 1593년 6월, 진주성에서 여성의 몸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왜적에 대항해서 장렬히 순국한 의기 논개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충절정신을 우리 모두 영원히 기리야함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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