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에서 ‘제2의 3·1운동’ 주도한 46명 깨어나다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 주도한 46명 깨어나다
  • 조현웅 기자
  • 승인 2019.01.0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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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작년 21명 서훈 신청이어 추가 46명 수형기록 발굴
강대용·여국엽 선생과 3남매·한집안 세 식구·호남출신 등 독립운동가 문건 공개
좌측부터 강대용, 여국엽, 여태원, 조복애, 조복금 선생.
좌측부터 강대용, 여국엽, 여태원, 조복애, 조복금 선생.

하동은 항일의병의 중심지로 3·1독립만세운동, 의열투쟁, 청년항일운동까지 이어진 하동의 독립운동사 속에서 많은 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들 중에는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이름 한 점 남기지 못하고 떠난 이도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3월 윤상기 군수와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2년간 추진했다.

전수조사 결과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46명의 수형기록이 3·1운동 100년만에 발견돼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 지난해에는 21명이 발견돼 서훈을 신청했다. 이로써 총 67명의 독립운동가 서훈신청이 이뤄졌다.

 

대구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형사공소사건부’에 1927년 강대용·임성필·여국엽 선생 등 13명과 관련한 인적사항 및 형량이 적시돼 있다.
대구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형사공소사건부’에 1927년 강대용·임성필·여국엽 선생 등 13명과 관련한 인적사항 및 형량이 적시돼 있다.

이번 서훈에는 제2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강대용(姜大榕·하동군 악양면)·여국엽(余國燁·악양면)·여태원(余太元·악양면) 선생 등 13명과 3남매 독립운동가 조복애(趙福愛·옥종면), 대를 이은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박성무(朴性茂·적량면),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호남출신 최백근(광양시)·김용상(정읍시)이 포함됐다. 지난 서훈에는 독립운동가 김계영·태영·두영 3형제의 여동생으로 오빠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해 4남매가 항일투쟁 한 김계정(金桂正·하동군 하동읍), 독립운동가 권대형 등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선 제영순(諸英淳하동군·읍내동)·조복금(趙福今·하동군 하동읍) 등이다.

이와 관련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형사공소사건부’·‘집행원부’·‘일제감시카드’·‘경남도 보고서’ 등의 자료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27년 하동에서의 제2의 3·1독립운동을 주동한 13명의 수형기록과 여성독립운동가 조복애 선생을 포함, 한집안 세 식구 독립운동가 등 46명의 항일행적이 담긴 수형문건을 찾았다”고 밝혔다.

1927년 하동 제2의 3·1운동 거사

이번에 발굴한 문건으로 인해 1927년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이 일어났음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악양면 출신 강대용·여국엽·임성필·여태원·송우복 선생 등 20여명이 1926년 12월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강대용 선생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제의 한반도 강탈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모의했다.

강대용(당시 41세)·여국엽(36세) 선생은 1927년 하동·광양지역 등 뜻있는 인사 100여명에게 비밀리에 연락, 하동장날을 기해 대규모 일제 규탄 시위를 하기로 했다.

선생은 같은 면 중대마을 임성필(47)·노종현(30)·이시용(30)·여성원(27)·여태원(24)을 규탄시위 총 연락책으로, 정동마을 송우복(42)·조한식(39), 동매마을 김수룡(29)·강상용(23) 등을 중심으로 빈틈없는 거사 준비를 진행했다.

또 선생은 하동·적량·고전 지역은, 하동읍 두곡리 거주 김삼륜(32)을 총책으로 했다. 그리고 인근 전남 광양지역은 진상면 섬거 출신으로 악양면 정서에 거주한 김무일(22)을 연락책으로 했다. 거사일은 하동장날인 3월 3일로 정했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지역인사는 광양군의 골약면·다압면·진월면·진상면의 김태수(30)·최한원(23)·최영근(22)을 포함, 300여명에 달했다. 시위는 인근 주민과 상인 장꾼 500여명도 가세했다. 시위대는 점차 늘어나 1000여명에 달했다.

강대용·여국엽 선생은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하동경찰서와 군청을 향해 거친 행진을 하면서 “조선민족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철폐하라, 일본인의 조선이민을 반대한다, 경작권 확립을 보장하라, 부당한 납세를 반대한다, 모든 학교 교육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제를 규탄했다.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다급해진 일본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일본경찰과 충돌, 진압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강대용·여국엽·여태원·임성필·송우복 선생 등 중심인물 50여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30여명이 재판에 넘겨져 주동자 강대용·여국엽 선생 등 13명은 진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騷擾)·상해(傷害) 등의 죄목으로 형이 확정될 때까지 징역 2년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 이은 청년항일운동

독립만세 운동 이후 청년운동으로 확산된 항일 투쟁이 하동에서 중점적으로 펼쳐졌다. 조동회, 김익원, 김태두, 김계영, 김태영 등 당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하동청년회관에서 3·1정신을 계승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을 위한 다양한 민족교양강좌를 가졌다. 하동 벽보신문인 <뭇소리 1호>를 발행하기도 했고, 전국 최초 좌·우파 계열이 통합해 발족한 ‘신간회’ 하동지부 결성식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가 이들의 활동을 탄압함에 따라 청년회관에서의 활동은 중단됐다.

이후 청년항일운동의 상징인 하동청년회관은 고등공민학교, 국민보도연맹 사무실 등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소유로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와 하동지역자활센터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전국 청년회관 26곳 중 지금까지 보존된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회관 앞에는 지난 1989년 6월 10일 6·10독립만세 항쟁기념일을 기념하는 ‘우국항일’(憂國抗日) 비석이 있다.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

3남매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조복애(趙福愛·1918~?·女·옥종면) 선생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조정래(건국훈장)의 여동생이며 독립운동가 조옥래의 누나이다.

선생은 1942년 숙명여자전문학교(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중 일제의 한반도 침탈정책을 비판하며 조국독립에 앞장섰다. 이같은 일로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동생 조옥래(趙玉來·1922~?) 선생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해 박응포·신기중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해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2년 2월 일본에서 검거돼 1943년 4월 일본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을 때까지 1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한집안 세 식구와 호남출신 독립운동가의 활약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가담한 박성무 선생은 하동지역 3·1만세운동 지도자 박치화(건국훈장)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박문화(대통령 표창)의 조카이다. 한집안 세 식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1931년 3월 진주공립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 수업료 철폐를 위한 동맹휴교를 선동한 혐의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고향 하동으로 돌아와 하동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에서 간부로 활동 중이던 신만중(건국훈장‧적량면)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하지만 하동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박성무 선생은 1933년 4월 그의 숙부 박문화가 살고 있던 전북 정읍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정읍공립농업학교 학생 최종엽(임실)·최봉한(군산)·김민옥(정읍)·최대열(부안)·이병국(창원)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1933년 5월 위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돼 1934년 9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을 때까지 4개월 여간 옥고를 치렀다.

옥중 순국한 정석용·이형석·이기호 선생

하동군 고전면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정석용(고전면)·이향석(고전면)·이기호(양보면) 선생은 1919년 4월 고전면 주교(배다리) 만세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세 선생은 고전면 출신 박영묵·이종인·정상정·정재기 등 33인과 일신단을 조직하고 4월 6일 주교리 장터에서 1000여 명의 장꾼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세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모두 순국했다. 이 같은 사실은 1952년 경남도가 작성해 내무부에 올린 ‘3·1독립운동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피살당한 애국자 명부’에서 확인됐다.

한편 여국엽 선생의 항일기록 발굴 소식을 접한 선생의 조카 여상규 국회의원(법제사법위원장, 사천‧남해‧하동)은 “숙부님이 투옥돼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부친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나 그동안 제대로 챙겨보지 못한 죄스러움과 민족애에 대한 존경심에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부친은 숙부님의 옥바라지를 위해 진주형무소까지 수차례 다녔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집안 어른들은 일제의 감시대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 의원은 “그동안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에 힘써온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면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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