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22. 진주의 저항정신과 여성독립투사 박덕실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22. 진주의 저항정신과 여성독립투사 박덕실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8.0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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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진주 독립만세운동 주도…진주 저항정신 맥 이어

약혼자 한규상은 후배, 박덕실은 여학생들을 동원하는 역할 분담
이후 사립 광림학교 내 상해임시정부 위한 혈성단(血誠團) 조직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 제공, 독립자금까지 제공하는 활동도 전개

목사부인 박보교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 진주지회장으로 활동
임신 중 몸으로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옥고 치르기도
추경화 선생 끈질긴 노력으로 2018년 8월에서야 대통령 표창 추서

※ 이번 호 글은 지난 7월 14일 진주향토인문학교에서 열린 충효실천운동본부 주최 ‘진주출신 여성항일투사 공적을 위한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진주 여성독립운동가 박덕실 여사.
진주 여성독립운동가 박덕실 여사.

1. 진주 저항정신(抵抗精神)의 전개과정

주체(主體), 호의(好義), 평등(平等)이라는 진주인 저항정신의 근원과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써, 1300여년의 진주역사의 흐름 속에서 끈끈하게 이어온 진주인(男女포함)들의 강인(强忍)한 저항과 인권, 그리고 충절정신(忠節精神)이 뚜렷이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본고에서 진주여성 독립투사 박덕실(朴德實:1901-1971)의 항일운동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분은 1900년 초에 진주시 평안동 45번지에서 태어나 1919년 3월부터 1930년대까지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남성 못지않게 보다 적극적이고, 필사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보다 진주지역에서만이 유달리 많은 여성출신 독립투사가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진주는 옛 선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지녀온 인적, 문화적 지역상의 특성인 진주인의 저항정신에 그 근간(根幹)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주인의 고유한 그 저항정신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①삼국시대(822년)의 김헌창(金憲昌)의 중앙정부에 항거 ②고려 신종(神宗)(1200년)때의 민란 ③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 ④1593년 계사순의(癸巳殉義)때 논개의 순국(殉國) ⑤1862년 진주농민봉기(임술민란) ⑥1906년 산홍(山紅)의 매국노 李址鎔에게 항거 ⑦1909년 경남일보 창간(최초 지방민심의 저항의식 표출) ⑧1913년 전국 최초 기생조합 결성 ⑨1919년 3월19일 진주 기생 한금화(韓錦花) 중심의 독립만세 사건 ⑩1992년 성계옥(成季玉:진주 한량무 예능보유자)의 1910년 이후 거의 80년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중단되었던 의암별제(義巖別祭:論介祭)의 복원 ⑪1907년 9월 호주 선교사 Dr.Hugh Currell의 진주군 대안동에 시원여학교(柴園女學校) 설립으로 서양 문물 및 서양사상 도입 등이 진주여성항일운동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상기 10개 진주인의 저항정신 전개과정 중에서 ④,⑤,⑥,⑧,⑨,⑩,⑪은 순수 진주여성들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갈력한 저항 운동으로, 바로 이와 같은 선대 진주 여성들의 저항정신과 독립정신이 그 맥을 이어 후대 진주 여성들에게 줄기차게 이어진 충절과 저항정신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박덕실(朴德實) 투사 이외에도 정금자, 제영순(하동), 김계영(하동), 김두영(하동), 김계정(하동) 그리고 박치정(밀양) 등은 모두 선대로부터 이어온 진주인의 저항정신을 대부분 전통적으로 강인하게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3월 17일 재현행사를 가진 3.1운동 진주 만세운동.
지난해 3월 17일 재현행사를 가진 3.1운동 진주 만세운동.

2. 박덕실(朴德實) 진주여성 항일투사(抗日鬪士)

박덕실(朴德實 1901-1971) 여사는 1960년대, 1970년대 적십자병원장과 한일병원장을 역임했던 한규상(1896-1971) 선생의 부인이며, 한규상 선생은 진주시 옥봉동 출신이며, 박덕실 여사도 진주시 평안동 출신이고 진주교회 초대 장로 박영숙의 딸이다.

3.1운동 당시 한규상 선생의 약혼자였던 박덕실 선생은 1919년 3월18일 정오 12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할 때 함께 했고, 한규상 선생이 중앙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 일제 순사에게 빼앗기자 박덕실 여사가 다시 빼앗으려다가 순사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한규상 선생은 사립 광림(光林)학교를 졸업하고 장차 취업과 진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 졸업 동기생 심두섭이 찾아와 김재화, 박대업 선생이 서울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왔다면서 진주에서도 독립투쟁을 전개하자고 설득하자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한규상 선생은 후배들을 동원하고, 또 당시 그의 약혼자였던 박덕실에게 여학생들을 동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그 후 한규상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구금되자, 박덕실 여사는 감옥으로 찾아가 위문도하고 사식(私食)을 넣어주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 그 후 한규상 선생이 진주재판소에서 대구복심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박덕실 여사는 사립 광림학교 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위해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고, 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숨겨주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독립자금까지 제공하는 활동도 했다. 동시에 박근이, 김두현 등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돕고 실행했다.

상해 임시정부 문서에서도 혈성단 조직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문서가 10여년 이후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는 의거(義擧)로 인하여 임시정부가 수색을 당하여 당시 일본 경찰에 빼앗기는 일이 있었는데, 뒤에 한민족독립운동 연감에도 기록되어 전해 올 정도로 큰 활약상을 보였다.

진주 3.1독립운동 기념비_진주성내 위치해 있다.
진주 3.1독립운동 기념비_진주성내 위치해 있다.

이후에도, 박덕실 여사는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목사부인 박보교 등과 함께 진주지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신간회(新幹會)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진주지회장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수행했다.

박덕실 여사는 당시 임신 중이었으나, 일경에 붙잡혀 진주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6개월간 옥고(獄苦)도 치르기도 했다. 그 당시 임신 중이지만, 악독한 일제 경찰은 여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매우 심한 고통을 받았지만, 정부에서는 재판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수십년간 정부 포상을 미루어 오다가, 추경화 선생께서 근년에 대구법원 당시의 형사사건부를 찾아 제출한 결과 몇년전 8월15일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追敍)된 것으로 안다.

박덕실 여사와 한규상(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된 분)은 아들은 없고, 따님만 6명인데 그중 세분의 따님들은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의학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에는 따님 다섯분은 사망하고, 제일 막네 따님만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박덕실(朴德實) 여사는 1971년에 사망하시고, 그 후 2018년 8월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기도 했다.

강신웅(姜信雄)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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