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7화 세조의 죽음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37화 세조의 죽음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8.2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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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권력 세조 비참한 죽음을 맞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 유래없는 많은 살육을 자행
능지처참으로 죽인 충신만 50명이 넘어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마저 역모로 몰아 죽여

세조의 인과응보 두 아들 모두 20세에 요절
악몽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하길 일쑤
피부병이 심해 고름 냄새가 천지에 진동 50세로 생 마감

세조의 왕릉인 광릉_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소재해 있다.
세조의 왕릉인 광릉_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소재해 있다.

1. 잔인한 살육

세조는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살육을 잔인하게 자행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107명을 처형했으며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70여 명이 처형되었다. 또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과 영양위 정종의 역모와 관련하여 14명이 처형되었다. 모두 184명이 처형된 셈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숫자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필자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조선상고사>에 누락된 인물이 상당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기록되지 못하고 이름 없이 희생된 사람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의 경우, 피끝마을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길 만큼 희생자가 많았는데 이들 모두 기록되지 않았다.

능지처참(거열형)은 형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이며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다. 팔다리와 목을 밧줄에 묶어 다섯 방향으로 수레를 끌게 하여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그런데 세조는 위 사건과 관련하여 무려 54명이나 능지처참시켰다. (이 숫자는 필자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조사한 것이므로 다소 가감이 있을 수 있음)

심지어 박팽년, 유성원, 허조는 형 집행 전에 사망하거나 자결하였는데도 그 시체를 끌어내 능지처참시키는 잔혹함마저 보였다.

2. 두 아들의 죽음
세조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인 의경세자와 차남 해양대군(예종), 그리고 의숙공주를 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딸을 하나 더 두었다고 전한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세희공주(극중 인물:세령)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장남인 의경세자는 세자 시절 스무 살에 요절하였고, 차남인 해양대군이 세조의 뒤를 이어 조선 8대 임금으로 올랐지만 그 역시 스무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과연 아비가 쌓은 업보를 자식이 받은 것일까?

참척(慘慽)이란 말이 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비극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은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고 했는데 세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의 딸 의숙공주는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에게 출가하였으나 자녀 없이 서른일곱에 죽었다.

세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와 고름이 묻은 옷_월정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로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삼에는 피고름이 묻어 있는데 세조가 앓던 피부병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와 고름이 묻은 옷_월정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로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삼에는 피고름이 묻어 있는데 세조가 앓던 피부병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세조의 피부병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다 그것으로 하여 숨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말하기를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이 있다.

1984년 7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에 금박을 새로 입히던 중 불상 안에서 피와 고름이 묻은 세조의 적삼과 발원문이 함께 발견되었다. 발원문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1466년에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세조가 죽기 2년 전이었으니 적삼에 피와 고름이 묻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세종의 피부병은 매우 심각한 상태임을 알게 해 준다.

4. 세조의 죽음


세조는 죽음에 이르러 극심한 피부병과 악몽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죽기 하루 전에 예종에게 보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의 무덤은 광릉으로써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 인수대비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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