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40화 경혜공주의 죽음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40화 경혜공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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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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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에서 노비로 추락한 경혜공주의 비극적 운명

순천 노비의 신분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경혜공주 딸을 낳아
두 아이의 신원회복을 세조에게 끊임없이 요구해
공주의 신원은 예종 때 회복되고 자녀 신원은 성종 때 회복

아들의 지극한 간병에도 불구 3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
남편 영양위는 사후 297년만인 영조 때 신원회복
경혜공주가 작성한 재산 상속 문서 분재기 2012년에 발견

드라마 속 경혜공주와 그녀의 남편 정조._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중에서
드라마 속 경혜공주와 그녀의 남편 정조._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중에서

1. 순천에서 다시 한양으로

남편 정종이 능지처참되고 순천 관노가 된 경혜공주.


공주를 순천의 관노로 팽개쳐 둔다는 것은 세조로선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었다. 영양위 정종을 죽임으로써 정적을 모두 제거한 셈인데 경혜공주를 외지에 두어 백성들로부터 공주를 박해한다는 여론을 굳이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세조는 경혜공주를 한양으로 불러올렸다.​

한편 경혜공주는 남편이 남기고 간 선물, 정미수를 지켜야 했다. 뱃속에 든 아이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관노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순천에 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경혜공주는 한양행을 결심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경혜공주는 세조에게 아들의 신원 회복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 사이 공주는 딸을 낳았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였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란 멍에를 써야만 할까?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오직 두 자식의 신원을 회복하고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죽을 때까지 계유정난 공신들을 설득하지 못해 공주의 소원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인 예종에게 경혜공주 자식들의 신원 회복을 유언처럼 남기고 죽고 말았다.

다행히도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다.

“지난번에 내가 선왕을 모시고 있었을 때, 선왕께서 전교하기를, 경혜공주의 아들은 죄인의 아들로 논해서는 안 된다 하셨으므로 앞으로는 마땅히 종친의 예로 대우하라.” - <예종실록> 예종 1년 4월 12일 기사 중에서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의 묘.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의 묘.

하지만 예종 역시 공신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경혜공주의 신원만 공주로 회복해 주었을 뿐 자녀들의 신원을 완벽하게 회복해 주지는 못했다. 어명으로 신원 회복을 시키긴 하였지만 벼슬에 나아갈 길은 막혀 있었다. 절반의 신원 회복만 이룬 셈이다.

2. 못다 이룬 꿈 성종이 이루어주다
경혜공주가 한양으로 돌아온 후 세조 비 정희왕후의 배려로 아들 정미수를 자을산군(정희왕후의 손자, 훗날 성종)과 함께 살도록 배려해 주었다. 자녀들의 양육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공주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경혜공주는 자녀들을 궁에 남겨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종이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러자 차기 왕 서열 3순위였던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죽마고우처럼 함께 자랐던 성종은 정미수를 잊지 않았다. 완벽한 신원 회복이 이루어졌다. 아직 정미수의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성종은 관직도 내려주었다.

꿈에나 그리던 자식들의 신원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경혜공주에게 병이 덜컥 찾아오고 말았다.

3. 죽음

경혜공주는 젊은 나이에 병을 얻었다. 병중에 있을 때 정미수의 효심은 지극했다.


“아들 정미수는 나이 16세로 공주가 병이 위독해지면 약과 음식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옷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기까지 하면서 병을 보살폈다.” - <성종실록> 성종 5년 1월 1일 기사 중에서


경혜공주는 죽기 사흘 전에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는 문서를 작성했다.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가로 66cm, 세로 70.5cm인 이 분재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2년 7월에 해주정씨 대종가로부터 고문서를 받아 정리하던 중 발견되었다.

경혜공주가 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재산상속문서.
경혜공주가 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재산상속문서.

[덧붙임] 분재기 내용

성화 7년(1473) 12월 27일 아들 미수에게 허락하여 물려주는 일

내가 불행하게도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을 못 하였거늘 이제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노비는 갑작스런 사이에 기록할 겨를이 없어 우선 정선방에 있는 집과 통진(지금의 김포)에 있는 밭과 땅을 먼저 물려주노라. 또한 정선방의 집은 내가 죽은 이후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어 자손에게 전하고 오래도록 지니며 살 것을 당부하노라.


경혜공주는 한 많은 일생을 39세로 마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공주는 아들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이 내내 걸리는지 상속 유서에 조차 그 마음을 담아 놓았다.
39세의 이른 나이. 경혜공주는 아버지 문종이 살다간 딱 그 나이만큼만 살았다.


남편 영양위 정종의 명예는 영조34년(1758년)에 와서야 특명으로 회복되었다. 죽은 지 297년 만이다. 또한 단종을 위해 충절을 굽히지 않은 충신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단종과 함께 장릉(단종의 무덤, 영월)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충신 명단에 정종의 이름을 올리게 됨으로써 완전한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정조 15년의 일이다.

다음 이야기는 < 마무리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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