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41화 연재를 마치며
[정원찬의 소설 따라 역사 따라] 제41화 연재를 마치며
  • 경남미디어
  • 승인 2020.09.2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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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 없는 정권찬탈의 역사적 후퇴 교훈 잊지말아야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우리 역사의 큰 재앙
쿠데타를 성공만 하면 영웅이 된다는 선례를 남겨
정난공신들에 의지한 세조의 정치 붕당정치를 낳아

분경금지법 철회하지 않았더라면 조선 역사 달라졌을 것
불행한 역사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숙청한 계유정난의 한 장면_jtbc 드라마 '인수대비' 중에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숙청한 계유정난의 한 장면_jtbc 드라마 '인수대비' 중에서

1. 소설을 탈고하기까지


역사바로세우기, 과거사 규명, 적폐청산, 이런 정치 논리가 내 의식의 저편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5백 년 동안 한 번도 숨을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왕조실록은 숨을 쉬고 있는데 나는 계유년 어느 늦가을에서 숨을 딱 멈추고 말았다.

계유정난. 세조가 정권을 잡은 그날이었다. 조선의 모든 병권을 수하에 두고 있는 김종서를 두고 수양대군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외쳤다.

“김종서 한 명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조선은 나의 세상이 된다.”

어둠이 깃들 무렵 시작된 역모는 다음날 새날이 밝아오자 마무리되었다. 수양대군이 조선을 품에 안는 순간이었다.

500년이 지난 뒤, 1979년 12월 12일 저녁. 닮은 꼴 역모가 전두환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만 잡으면 된다. 전두환은 그를 따르는 하나회 무리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정권의 찬탈은 군사의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만 잡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그들은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내가 아니면 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여…”

세조가 했던 말을 전두환도 똑같이 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그럼에도 세조는 단종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조가 사육신 등 많은 충신을 죽였듯이 전두환도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쁜 짓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도 배운다고 했던가. 두 역모 사건의 닮은꼴 역사를 보며 변명만 있을 뿐 반성이 없는 두 역사를 고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경혜공주의 삶이었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작가 후기 중에서 인용


문종의 딸로 태어난 경혜공주. 도성 내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출중한 미모를 지닌 그녀는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영원토록 달콤하고 향기로울 것 같았던 그녀의 삶도 한 순간에 파괴되고 말았다. 숙부인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였다. 그녀는 동생도 잃었고 남편도 잃었다. 모든 걸 다 잃고 말았다.

동생 단종을 지켜내지 못한 누이의 마음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공주의 남편이란 이유로 능지처참 당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공주의 아픔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소설을 마칠 때까지 경혜공주의 아픔이 내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늘 붙어 있었다.

2. 역사의 재앙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집권은 우리 역사에서 큰 재앙이었다. 명분이 없어도 쿠데타를 성공만 하면 영웅이 되는 선례를 세조가 만들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그런 악행을 감추기 위해 여러 기록에서 역사를 왜곡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일부 학자 중에는 세조를 훌륭한 임금 중의 한 명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쿠데타를 하긴 했지만 조선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 초기 사회를 크게 안정시킨 역할을 했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 안정은 태종과 세종 대에서 씨를 뿌린 곡식이 이 무렵에 결실을 맺은 것일 뿐 세조의 업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세조의 왕권 강화는 태종과는 질적으로 사뭇 다르다. 태종은 외척 등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외척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 등 정난공신의 힘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했으니 왕권의 강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성종이 새 정치를 펼치고자 할 때 이들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은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를 정치적 파트너로 키웠다. 결국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은 조선 중기의 붕당정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모두 세조가 키운 훈구파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삶을 통해 본 계유정난을 그린 정원찬 작가의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삶을 통해 본 계유정난을 그린 정원찬 작가의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3. 분경금지법이 시행되었더라면


분경금지법이란 청탁과 부조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상급관리의 집을 하급관리가 사사로이 방문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말한다. 처음 분경금지법이 시행될 정종 때에는 인사 청탁과 관련이 있는 부서의 관료에게 해당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이를 무신들에게도 적용하였으니 이조와 병조의 관료들에게도 확대된 셈이다. 이조와 병조에 소속된 인사 관련 실무자에겐 따로 감시자를 붙일 만큼 철저한 정보 정치를 했다. 분경금지법은 부정 청탁 방지라는 본래의 취지를 떠나 왕권 강화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단종은 즉위하자마자 의정부 대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친에게도 이를 확대 시행한다고 공표했다. 수양대군 주위로 몰려드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 주 목적이었다.

왕권을 넘보고 있던 수양대군에겐 분경금지법 시행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주위로 몰려드는 세력들이 분경금지법에 묶여 발을 들일 수 없게 된다면 수양대군으로선 송장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친들을 동원하여 저항하였다. 사실 수양대군으로선 분경금지 조치에 항의할 명분이 그다지 없었다. 종친이 정사에 참여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그래서 종실의 명예 추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결국 명분에 밀린 단종은 하루 만에 분경금지법을 철회하고 말았다.

만일 단종이 분경금지법을 철회하지 않았더라면 수양대군의 세력은 그것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유정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무단정치가 아니라 세종이 이루어놓은 문민정치가 꽃을 피웠을 것이다.

4. 닮은꼴 역사​


단종이 권력을 빼앗기고 쫓겨났듯이 신군부에 의해 최규하 대통령도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가 물러났다. 닮은꼴 역사가 5백 년이 지난 뒤 다시 되풀이된 것이다. 법정에 선 전두환에게 거사 날짜를 12월 12일로 정한 이유를 판사가 물었더니 본인은 쌍으로 된 숫자를 좋아해서라고 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이 10월 10일이었으니 쌍으로 된 숫자가 그들끼리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일까?

경혜공주. 그녀는 아버지 문종이 살았던 딱 그 나이(39세)만큼만 살다가 죽었다. 단종을 지키고, 남편을 지키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녀는 공주이기 이전에 권력에 눈이 먼 자에 의해 희생된 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통해 바로세우지 못한 역사를 되짚어보며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탈고했다. 아울러 세조에게 희생된 많은 충신들의 넋을 기리고, 군사정권에 희생된 선열들의 죽음 또한 기리면서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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